[살며 사랑하며] 다이어리 끝까지 쓰기

[살며 사랑하며] 다이어리 끝까지 쓰기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입력 2023-12-01 04:03

연초에는 소소한 다짐을 하게 마련이다. 그중 하나가 ‘다이어리 끝까지 쓰기’다. 9월부터 일기 쓰기를 소홀히 했더니 뒷장이 깨끗하다. 이즈음 되면 나는 다이어리를 끝까지 채워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내 나름의 즐거운 강박인 셈이다. 어릴 적에 밀린 일기를 몰아 쓰듯 기억을 되살려 다이어리를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몰아 쓰는 일기가 귀찮지만은 않다. 한꺼번에 소환돼 보따리처럼 쌓인 기억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일정표에 적어둔 메모를 옮겨 적는다. 기록하지 않았으면 휘발될 뻔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한여름 친구와 먹었던 말차 빙수, 미술관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쳤던 일, 혼자 본 영화의 여운을 곱씹느라 새문안교회에서 독립문까지 무작정 걸었던 길, 그리고 또….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는 다소 현실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바로 통장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솔직한 삶의 기록은 얼마간 꾸며 쓰는 다이어리가 아니라 통장 명세서에 있는 게 아닐까.

여하튼 올해는 제법 비싼 다이어리에 무료 각인 서비스까지 받는 허세까지 부렸다. 내년에 쓸 다이어리도 신중하게 고른다. 종이의 질감은 어떤지, 뒷면에 잉크가 번지는 정도나 휴대하기 좋은 아담한 크기인지 깐깐하게 살핀다. 언젠가부터 나는 다이어리 맨 앞장에 고양이 수염을 붙여 두곤 한다. 고양이 수염이 행운을 가져온다는 말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고양이 수염은 생선 가시처럼 빳빳하다.

지금껏 쓴 일기를 한 줄씩 이어 붙여 물리적인 거리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일기장에서 빠져나온 글자가 개미처럼 줄지어 가는 상상을 해본다. 어떤 문장은 독자를 만나 그의 내밀한 공책에 기록되기도 했을까. 고양이 수염을 발견한 것처럼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눈이 반짝 빛났을까. 고양이가 털실을 가지고 놀듯이 이런저런 생각의 타래를 굴려 본다. 푸근한 겨울밤이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