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허구와 이야기

[살며 사랑하며] 허구와 이야기

김선오 시인

입력 2023-12-04 04:06

영화 ‘갓랜드’는 19세기 후반 유럽을 배경으로 젊은 덴마크 신부 루카스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아이슬란드와 덴마크의 황량한 자연 속을 헤매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루카스는 여행 내내 거대한 카메라 장비를 이고 다니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촬영한다. 영화의 도입부에 ‘이 영화는 아이슬란드 동부를 처음 찍은 일곱 장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안내 문구가 등장한다. 사실 그 사진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슬란드 동부를 처음 찍은 사진’이란 감독이 지어낸 허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허구에서 시작된, 허구로부터 영감을 받은 창작물이다.

어젯밤 꿈속에서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한국어로 된 책이었으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읽어야 했다. 한 페이지를 읽으려면 책의 오른쪽 하단에서부터 왼쪽 상단까지를 눈으로 따라가야 했다. 글자는 좌우반전의 형태로 뒤집혀 있었다. 평생 이렇게 읽어온 것처럼 익숙하게 독서를 진행할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 책을 보았는데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위에서 아래로 읽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어 글자가 쓰인 방식도 어딘가 어색했다. 꿈속의 글자들에 익숙해진 탓에 현실에서 읽고 있는 글자들이 뒤집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동안 꿈과 현실 중 어느 쪽이 원본인지 알 수 없는 착란을 느꼈다.

꿈은 현실에 영향을 받아 생성된다고 여겨지지만 이처럼 현실이 꿈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현실처럼 꿈에서도 모종의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몸에 새겨져 우리의 감각을 재편한다. 허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허구와 현실이 전혀 다른 것이라 생각하지만 허구는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현실 역시 일종의 허구이기도 하다. 과거는 언제나 우리의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야기라는 형식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