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용대 (4) 꿈처럼 펼쳐진 인기가수의 길 걷다 ‘소아마비’ 날벼락

[역경의 열매] 전용대 (4) 꿈처럼 펼쳐진 인기가수의 길 걷다 ‘소아마비’ 날벼락

퇴사 후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찾다가
실력 인정받았던 노래 부르기로 결정
낮엔 공부하고 밤엔 야간업소서 노래
갑자기 어릴 때부터 겪었던 통증이…

입력 2023-12-0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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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대 목사가 1981년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앨범 녹음을 하고 있다.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몸에 꽉 조이는 옷을 입어 피가 통하지 않고 숨도 쉬기 힘든 기분이 이어지면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결론을 내야 했다. 내가 힘겨워할 때마다 따뜻하게 격려해주셨던 부장님께 인사할 겨를도 없이 회사를 나왔다.

회사 기숙사는 더이상 내 보금자리가 돼줄 수 없었고 검정고시도 치러야 했다.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그때 문득 노래가 떠올랐다. 현실의 벽 앞에서 잠시 잊고 살았지만 노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길로 한 사람에게 전화했다.

광주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1등하고 컬러 TV를 받던 시절부터 내 노래 실력을 인정해주셨던 노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갈 곳이 없더라고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는데 연고지도 없고. 그러다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노래도 부르고 싶고요.”

선생님은 기억에서 잊힐 만 할 때 연락을 해온 철부지 제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셨다. “용대야. 연락 잘했다. 넌 정말 노래에 소질이 있어. 계속 노래하자.” 회사에서 동네북처럼 모진 핍박만 당하던 나를 따뜻하게 녹여준 난로 같은 말씀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노랫길이 펼쳐졌다. 낮에는 학원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밤에는 야간 업소에서 가요를 부르는 생활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무대는 꽤 인기 좋은 코너가 됐다. 당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고향을 다녀온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내가 고향에 대한 향수와 부모님에 대한 노래를 불렀으니 당시 손님들은 눈물을 훔치며 앙코르를 연호했고 술을 더 주문했다. 야간 업소 사장님 입장에선 내가 매상을 올려주는 최고 가수였던 셈이다.

이름이 점점 알려지고 인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이었다. 어느 날 새벽, 몸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잠에서 깼다. 어릴 때부터 겪어왔던 통증이었지만 이번엔 그 고통이 몇 배로 심하게 느껴졌다. 그러기를 몇 차례, 결국 사달이 났다. 밤무대에서 첫 번째 곡을 마치고 두 번째 곡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희미해졌다. 눈을 떠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업소 관계자 몇 명이 보였다.

“그렇게 아프면 이야기를 하고 하루 쉬지. 노래를 듣던 손님들도 다 놀라게 하고. 이게 뭔가!” “죄송합니다.”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말하면 자칫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거듭 죄송하다는 얘길 반복할 따름이었다.

계속 병원에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퇴원을 하고 하루 쉰 뒤 나는 다시 노래하러 업소에 나갔다. 그러곤 죽을 힘을 다해 견뎌내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날 새벽, 또다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엉엉 울음이 나올 정도였다. 내 울음소리를 들은 자취방 주인이 무슨 일이냐며 방으로 들어오더니 깜짝 놀라 황급히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 X레이 사진 보이죠? 오른쪽과 달리 왼쪽 다리는 통으로 된 뼈가 없고 마치 가루가 붙어 있는 거로 보입니다. 소아마비입니다. 너무 많이 진행돼서 앞으로는 정상적으로 걷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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