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내가 잘하는 한 가지 ‘멍하니~~~’

[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내가 잘하는 한 가지 ‘멍하니~~~’

입력 2024-02-17 03:09
  • 미션라이프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픽사베이

아버지는 암과 동거 중이다. 그것도 셋이나 된다. 전립선암이 찾아온 지는 17년도 넘었다. 5년 전에는 혈전암이 찾아왔고 이어 폐암이 왔다. 거기다 간헐성 기억장애(치매)가 있다. 귀는 보청기로도 모자라 어머니의 통역을 필요로 한다. 어머니는 말 그대로 ‘할 망구’(望九·90세를 바라본다는 의미)를 넘어 몸에 난 터럭까지도 늙었다는 90의 ‘모질(耄耋)’이 되셨다. 다행히 아버지와 달리 큰 병이 없으시다. 건강 체질이어서가 아니다. 어머니의 건강 비밀은 ‘멍하니’(멍때리기)에 있다.

빨래터에서는 물멍, 아궁이 앞에서는 불멍, 나물 캐러 산에 가서는 숲멍을 했다. 아버지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6남매 자식들이 또다시 헤집어 놓았다. 벌겋다 못해 새까맣게 썩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밥을 지으며 걱정과 근심을 불구덩이에 던졌다. 빨래터에서는 ‘난타’ 공연으로 분노를 다스렸다. 흐르는 물을 쳐다보며 무념무상으로 세월을 달랬다. 봄에는 나물과 쑥을 캐고 겨울에 쓸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을 찾았다. 어머니는 나무에 기대어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큰 숨을 쉬었다. 내 어머니의 ‘멍~하니(honey)’였다.

배철현 전 서울대 교수는 말한다. “신은 유대인에게 십계명을, 그리스인에게 파르테논 신전을, 로마인에게 콜로세움을, 인도인에게 요가를 선물했다”고. 그렇다면 한국인에게는 무엇을 선물했을까. 나는 주저 없이 답한다. 멍때리기. ‘멍하니~’를 선물해 주셨을 거라고.

요즘 종종 비정상의 정상을 경험할 때가 있다. 자주 덤벙댄다, 뭔가 까먹는다, 의욕이 사라진다, 만사가 귀찮다, 말이 꼬인다, 실수하지 않아도 되는 실수를 되풀이한다, 짜증이 는다, 왠지 모를 외로움과 소외감이 있다, 버럭 성질을 낸다, 내 꿈이 멀리만 느껴진다… 모두 ‘뇌 체증’을 알리는 적신호다. 나이 먹은 사람만이 아니다. 청소년이나 어린 자녀에게도 나타난다.

우리 모두 미디어와 스마트폰에 너무 많이 노출돼 있다. 오죽하면 가로등 불빛에 잠 못 든 들깨도 잠 좀 자게 해 달라고 소리쳤겠는가. 미국 하버드대 84학번 동문을 대상으로 졸업 30주년 설문조사 결과 가장 채우고 싶은 욕구는 뜻밖에도 수면욕이었다. 잘 자는 일이 섹스나 돈보다 더 중요했다. ‘최고의 휴식’을 쓴 작가 구가야 아키라는 뇌의 휴식이 진정한 휴식이라 말한다.

뇌 휴식엔 뇌 영양제도, 한방(韓方)의 총명탕도 해결책이 아니다. ‘멍하니’만 한 게 없다. 이어령 선생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깊은 통찰을 남겼다. “넘치는 시각 정보에서 도피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불멍 향멍 구름멍 물멍, 일명 생각의 진공 상태인 ‘멍’의 방주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이런 식의 멍때리는 행위를 일컬어 이어령 선생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을 하는 능동적 방어’라고 했다.”

이래서 ‘멍하니’는 명상과 다른 ‘멍상’이다. 산사(山寺)를 찾고 명소나 호텔을 찾아야 멍은 아니다. 일부러 멍석 까는 것은 공연이지 ‘멍하니’가 아니다. ‘비집중 모드’로 전환하는 순간순간이 모두 멍하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를 찾아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주는 공간이 멍하니의 영성 공간이다.

만성피로를 호소하는 이에게 ‘잠 좀 자라’ 했더니 이렇게 대꾸한다. “아이고 잠이 ‘와야’ 잠을 자지요.” 그 한 마디가 나에겐 꿀잠의 ‘유레카!’였다. 잠은 자려고 하면 달아난다. 마치 그림자를 잡으려고 하면 저 멀리 도망치듯. 그래서 우리는 ‘잠이 온다’ ‘졸음이 온다’고 한다. 잠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멍’도 때리려 하면 줄행랑을 친다. 찾아와야 한다. 그래서 ‘멍~하니’다.

잠의 가지 수가 수십이고 바람과 비의 종류가 한없듯 멍도 끝없다. 어머니의 불멍 물멍 숲멍을 넘어 하늘멍 바람멍 구름멍에다 무덤멍도 있다. 구겨진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름멍도 있다. 멍멍이와 함께하는 ‘멍멍멍’도 있다지 않은가. 요즘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뭐 하니? 멍하니?”

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동서대 석좌교수
국민일보 문서선교 후원
갓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