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리의 예수… 끝내 몰라보는 군중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낮은 자리의 예수… 끝내 몰라보는 군중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22) 이번엔 그림 묵상

입력 2024-02-17 03:06 수정 2024-02-17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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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게티센터에 전시된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1889년’ 작품 전경.

개인 일정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머물고 있다. 7주마다 돌아오는 걷기 묵상 칼럼을 위해 미국에서도 걷기를 시도했으나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했다. 미국의 공립 명문대인 UCLA 캠퍼스에서 시작해 대학 앞 해머미술관을 지나 신미양요 당시 참전한 미군이 묻혀 있는 LA국립묘지를 거쳐 산 위의 게티센터까지 둘러보는 일정을 시작했지만 난관에 부닥쳤다. 총기 소지가 자유롭고 길거리 범죄가 많은 미국에선 차에서 내려 홀로 걷는 순간부터 온갖 위험이 몰려온다.

외진 곳에선 혼자 걷는 이가 거의 없다. 모두 차를 타며 이동하거나 걷더라도 둘 이상 동행하거나, 혼자 걷는다면 적어도 개 한 마리쯤은 동반했다. 부득이 혼자라면 걷지 않고 달렸다. 살찌는 걸 막기 위해 조깅하는 것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고급 주택가엔 여지없이 선을 넘으면 곧바로 총기로 대응한다는 경고판, 개가 상처를 입히고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표지판, 가장 온화한 정도가 ‘당신 행동을 찍고 있으니 웃으라’는 CCTV 안내문이었다.

그래서 택한 게 그림 묵상이다. LA 여행객이라면 꼭 방문하는 게티센터의 예술품을 감상하기 위해 종일 뮤지엄 구석구석을 걷다 보니, 이곳이 걸으며 묵상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티센터는 대공황 시절 석유 업계를 장악해 세계 최고의 부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바 있는 폴 게티(1892~1976)의 소장품을 전시한다. 렘브란트 판레인,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등이 그린 유럽 최고의 작품이 모여 있다. 그리스 로마 문명의 고대 예술품은 이곳에서 차로 20여분 퍼시픽하이웨이를 달려 도착하는 게티빌라에 따로 모여 전시돼 있다. 두 곳 모두 관람료는 무료, 주차비만 낸다.

게티센터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가 그린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1889년(Christ’s Entry into Brussels in 1889)’이었다. 우선 이곳에서 가장 크기가 큰 회화 작품이다. 가로 431㎝ 세로 252㎝로 미술관 서쪽 파빌리온의 한 전시실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어른 눈보다 약간 더 높은 위치에 걸린 이 그림 앞에 서면 원색으로 강렬하게 표현된 군중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실제 이 그림은 벨기에의 마디그라 축제를 담은 것이다. 사육제의 마지막 날 열리는 즐거운 퍼레이드의 모습이다.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사순절의 전날 상황이다. 금욕의 사순절을 앞두고 술과 기름진 음식을 먹는 사육제의 마지막 날을 표현한 것이다.

재림한 예수님이 브뤼셀 이 축제의 현장에 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를 가정한 그림이다. 브뤼셀 시장은 오른쪽 난간 위에 서서 초점 없는 눈으로 군중 속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고,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코가 빨간 술주정뱅이로 표현돼 있다. 교권을 가진 종교권력자는 지휘봉을 들고 행렬의 맨 앞을 이끌고 있고, 그 옆에 온갖 기괴한 얼굴의 정계 재계 고위 인사들이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데 뒤에 있는 나귀를 탄 예수님에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예수님이 서울 광화문에 다시 오신다면 이와 다르다고 우리 역시 자신할 수 있을까. 지극히 낮은 자세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겸손함을 유지하지 않는 한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는 비극이 반복될 것이다.

UCLA 앞 해머미술관에도 앙소르의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1889년’ 작품이 에칭 앤 드라이포인트로 전시돼 있다. 작은 도화지 크기의 흑백으로 1898년 제작됐다. 색감을 배제하고 철필로 긁어 표현했는데 역시 명품이다. 군중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선명하게, 예수님은 저 멀리 흐릿하게 표현했다. 두 그림 사이를 오가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에 관해 생각해 본다.


LA=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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