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다

자화상,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다

[책과 길] 자화상 내 마음을 그리다
김선현 지음
한길사, 360쪽, 2만8000원

입력 2024-02-22 21:31 수정 2024-02-23 10:56
화가 마리엔네 폰 베레프킨을 그린 초상화(왼쪽)와 자화상. 같은 사람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 그림 속 여성은 달라 보인다. 초상화에 그려진 '남들이 보는 나'와 자화상에서 드러낸 '자신이 보는 나'는 이렇게나 다르다. 한길사 제공

그림에는 자화상이라는 장르가 있다.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15세기경부터라고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동방박사의 경배’(1475년) 그림 오른쪽에 관람객을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이 화가가 그린 최초의 자화상일 수 있다. 주문 제작자였던 화가들에게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생겨나면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상화가 대상의 외면을 묘사한다면, 자화상은 화가의 내면을 표현한다. 자화상은 ‘자신이 보는 나’를 그린 것이다. 그것은 ‘남들이 보는 나’와 다를 수 있다. 마리엔네 폰 베레프킨을 그린 초상화와 자화상을 비교해 보면 같은 사람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1909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초상화 속 베레프킨은 너무나 여성스럽고 화사하다. 하지만 1910년 베레프킨이 그린 자화상 속 여성은 무서울 정도의 분노를 뿜어내고 있다. 가정부와 결혼해 자신을 떠난 연인에 대한 분노, 혼자 남겨진 삶에 대한 의지 등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미술치료 전문가인 김선현(55)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는 “자화상은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라고 말한다. 자화상은 화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김 교수는 새 책 ‘자화상 내 마음을 그리다’에서 화가 57명이 남긴 자화상 104점을 들여다 보며 화가들의 마음과 생애를 읽어낸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 중 하나다. 그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조현병, 가난, 고독과 우울, 두려움 등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김 교수는 “그에게 자화상은 예술의 응결체로 자신의 열악한 여건에서 택한 종착점이자 영혼의 반영이고 자아실현이며 자기치료법이었다”고 설명했다.

파블로 피카소도 3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의 자화상 중에 91세에 그린 ‘죽음에 맞선 자화상’(1972)이란 작품이 있는데, 얼굴은 해골 모양을 하고 있지만 두 눈은 앞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는 몸을 돌리지도,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다가오는 죽음을 응시했지요.”

그림은 아돌프 히틀러가 20대 초반에 그린 자화상으로 젊은 시절 그가 소심하고 위축된 사람이었음을 알려준다. 한길사 제공

아돌프 히틀러가 남긴 자화상은 독재자, 학살자라는 이미지와는 상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히틀러는 10대에 두 차례나 빈 미술학교에 지원했다가 거부당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20대 초반인 1910년에 그려진 자화상 속 히틀러는 한없이 왜소하다. 그림의 중심은 돌다리이며 히틀러는 왼쪽 구석에 작고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머리 위에는 자신을 부정하는 듯한 ‘X’ 표시도 있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내면적으로 소심하고 위축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랬던 히틀러가 군에 입대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3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그림의 힘’ 저자이기도 한 김 교수가 자화상에 주목하는 것은 그림과 마음이 맺고 있는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내면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지난 20일 열린 출간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 “요즘 MBTI가 굉장히 유행하는데, 다른 사람의 심리를 알고 싶고 무엇보다 자신을 알고 싶다는 것”이라며 “그림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어떤 그림이 유독 좋다거나 그림을 보고 기쁘거나 눈물이 난다면, 그 그림은 자신의 심리 상태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색깔이 6개월 이상 좋아진다면, 그 색이 자신의 심리와 연결돼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미술전공자 출신으로는 드물게 의과대학 교수로 채용돼 20년간 병원에서 미술치료를 해왔다. 그는 “그림이 병을 낫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환자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환자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명화를 보여주면 눈물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통해 그 환자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 그림을 통해 자기에게 집중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환자가 우울감을 극복하고 치료 의지를 되찾기도 한다.”

그는 특히 마음이 외롭고 아픈 사람들에게 그림을 적극 권한다. 그림을 그려도 좋고, 보는 것도 좋다. 좋은 그림이 수록된 책을 보는 것도 좋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 중 한 명인 쿠사마 야요이는 미술치료의 대가다. 정신질환이 있었고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던 쿠사마 야요이는 어릴 적 엎드려 울던 식탁 위 식탁보의 땡땡이 무늬를 평생 그렸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조현병을 이기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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