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精談] 왜 긴 소설을 읽어야 할까

[너섬精談] 왜 긴 소설을 읽어야 할까

최민석(소설가)

입력 2024-02-28 04:05

독서 근력이 현대인 생존력
긴 소설 읽으며 독자는
이야기꾼이자 작가가 된다

이 글은 내가 천 페이지 넘는 소설을 막 읽어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쓴 게 절대 아니다. 나는 굳이 그런 것까지 뽐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고매한 독자께서는 이미 제목을 읽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왜 긴 소설 따위를 읽어야 하는 거야?’라고 의문을 품을지 모르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긴 소설을 ‘반드시’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 긴 소설을 멀리한다고 해서, 애인이 돌연 결별을 고하거나, 전기세가 왕창 나온다거나, 주식이 폭락하지는 않는다(행여 그랬다면, 송구합니다). 요컨대, 삶이 급작스레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 글은 그저 긴 소설을 좋아하는 이가, 그 독서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썼을 뿐이다.

얼굴이 큰, 한 배우의 사인회장에 팬들이 응원의 현수막을 들고 왔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좋은 건 크게 봐야 한다!” 백 퍼센트 공감했다. 긴 소설을 좋아하는 나 역시 그리 생각하니까. 좋은 건 크게 봐야 하듯, 재미있는 건 오래 봐야 한다. 그러니 흥미진진한 소설은 두꺼워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질문할 수 있다. 아니, 두꺼운 소설이 어떻게 흥미로울 수 있느냐고? 이 질문에는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긴 소설이 재미없을 수 있는가? 물론, 작가가 그저 두껍게 써보는 걸 목표로 삼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책은 출판되기 어렵다. 가뜩이나 출판시장이 어려운 마당에, 출판사가 종이 낭비를 할 필요가 있는가(환경 서적까지 내는 출판사가 펴낸 긴 소설이라면 더 믿을 수 있다).

더욱이 두꺼운 소설이 외서라면 출판의 문제에 번역의 문제까지 부딪힌다. 아울러 두꺼운데 안 팔리면 절판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두꺼우면서, 번역까지 됐고 오랜 시간까지 버텼다면, 재미없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믿는 건, 책벌레뿐 아니냐고? 그럴 수 있다. 그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현대사회는 지식정보 사회이고 지식 노동자는 다양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그 체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무형의 지적 결과물을 생산한다. 따라서 방대한 양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획득하는 능력은 실로 중요한데, 그 정보를 가장 능률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는 문자다.

결국, 독서 근력이 현대인의 생존력이다. 이 근육을 키우기에 긴 소설만큼 좋은 게 없다. 훌륭한 소설일수록 등장인물은 많고 그들은 각자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인물들이 빚어내는 사건 또한 다양하다. 그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머릿속에는 가계도가 그려지고 그 인물들이 겪은 사건의 연대기가 그려진다. 자연스레 방대한 정보를 흥미롭게 처리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러니, 이처럼 생산적인 여가 활동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감독이 정한 속도대로 흘러가는 영상과 달리, 책은 반드시 독자가 이해해야만 넘길 수 있다. 그리고 문장 사이에 생략된 여백에 자신만의 생각을 덧씌우며 읽어야 한다.

이 생산성 높은 지적 활동을 흥미롭게 유도하는 것이 바로 긴 소설이다. 그러니, 광활한 우주를 이해하고 싶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고 길고 힘든 삶을 버텨내기 위해 어찌 긴 소설을 동반자로 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이야기꾼의 세계로 들어와 여정을 함께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 역시 이야기꾼이 된다.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다고? 그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당신이고 당신은 이미 긴 소설을 읽으며 자신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므로, 독자는 긴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꾼이 되고 독자인 동시에 작가가 된다.

끝으로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 글은 내가 다음에 낼 소설이 장장 천 페이지에 달해서 쓴 게 아니다. 나는 굳이 그런 것까지 부탁할 사람이 아니…아, 아니, 맞다.

최민석(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