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바보에 대한 그리움

[시온의 소리] 바보에 대한 그리움

입력 2024-02-29 03:04 수정 2024-02-29 17:12
  • 미션라이프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똑똑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교육 수준도 전체적으로 높아졌고 인터넷으로 필요한 정보를 쉽게 구할 수도 있다. SNS로 언론보다 더 빠르게 뉴스가 전파되고 기자들이 보도하지 못한 세세한 내용도 공유된다. 인공지능이 상용화되면서 전문가와 일반인의 경계마저 흐려졌다.

세상은 이처럼 똑똑해졌는데 일상의 빛깔은 여전히 흐리다. 폭력과 갈등의 소식이 끊이지 않아서일까. 정보화로 삶이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변했다지만 하루하루가 더 팍팍해지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괜스레 이럴 때 그리워지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뭔가 부족한 듯해도 나와 너의 잘못마저 넉넉히 담아줄 것 같은 ‘바보’이다.

바보는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하할 때 종종 사용되는 단어다. 그런데 교육을 나름 잘 받았던 바울이라는 1세기 유대인은 자기와 동료를 바보라 불렀다. 로마 제국에서도 잘난 사람이 살던 도시, 고린도에 편지를 보내며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됐다고 한다.(고전 4:10, 공동번역) 예나 지금이나 머리를 굴리며 계산적으로 살아도 만만치 않은 게 세상인데 바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다니 그야말로 바보짓이 아닐 수 없다.

고대 지중해 지역 역사를 공부해 보면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바보 같은’ 이들이었다. 예를 들면 복음을 받아들인 귀족은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평민처럼 옷을 입었다. 머리를 더부룩하게 자르고 초라한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전에 어울리던 친구나 친지는 이들의 가난한 농부 같은 모습에 놀랐지만 이들이 바보처럼 행복해하고 있음에 더 충격을 받았다. 그러다 혹 누군가 ‘사유 재산’을 언급이라도 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자신에게 내릴 것처럼 놀라기까지 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된 사람은 바보가 되려고 해서 바보가 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우직하게 따르려 했을 뿐이다.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친 스승처럼 부와 권력과 명예를 삶의 중심 가치로 삼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그 결과 세속적인 성공에서 관심이 멀어졌고 대중의 존경 대신 모욕을 감수했으며, 가문의 재산을 지키고 불리는 것보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는 길을 택했다.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지 않고자 기이한 언행을 일삼았고 대중이 선호하는 삶의 방식과 기준을 위선이라 비판했다.

이러한 바보스러움에 대한 강조는 특히 동방정교회 전통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바보처럼 살았던 성인은 ‘거룩한 바보들’(holy fools)이라고 불렸다. 이들의 이야기는 문학과 예술의 단골 소재가 되곤 했다. 거룩한 바보들을 종종 작품에 등장시킨 러시아 출신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이 인간들은 순례자의 모습과 누더기를 걸친 거지의 모습으로 질서가 잡힌 사회관계 속에서 사는 보통 사람의 눈길을…예언과 희생과 기적에 가득 찬 또 다른 세계로 돌려준 자들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며 변화의 흐름에 도태되지 말고 잘 적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교회라고 예외도 아닌 듯하다. 어떻게 하면 현대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여간 크지 않다. 교인 중에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인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태되지 않으려는 조급함과 똑똑해지려는 강박감은 교회마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게 만들 수 있다. 오히려 이런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실패하거나 무기력한 사람이 편안하게 곁에 머물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바가 다가 아님을 증거할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임을 잊지 말자.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신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이 우직한 바보스러움을 멀리하면 스승께서 이 세계에 켜놓은 희망의 불꽃도 흐려지게 마련이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
국민일보 문서선교 후원
많이 본 기사
갓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