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불행한 나라의 저출산

[돋을새김] 불행한 나라의 저출산

이영미 영상센터장

입력 2024-03-05 04:08

한국인들이 화끈하긴 하다. 좌절마저 힘차게 해낸다고 할까. 뭐든 중간이 없고 적당히도 모른다. 성취를 향해 달릴 때 그랬듯 절망도 빠르고 성실하게, 온몸 던져 열정적으로 한다.

합계출산율 0.72명. 국가 소멸 수준이라는 대한민국의 저출산은 뭐든 대충하는 법 없는 나라다운 롤러코스터급 전개, 이게 바닥인가 싶으면 또 바닥이 뚫리고 저것까지는 아니겠지 할 때 그것조차 돌연 가능해지는 K막장의 현실판처럼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속도로 가난에서 탈출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우리는 그만큼이나 빠르게 파국을 향해 직진 중이다.

다수가 동의하듯 한국의 저출산은 불안정한 청년 일자리와 높은 주거비, 사교육 과열의 직접적인 결과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일·육아 병행이 어려운 장시간 노동과 성차별·경력단절 같은, 바꾸고는 있지만 충분히 빠르게 바꿔내지는 못한 오랜 문제들이 뒤엉켜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러니 해법을 묻는다면 답은 나와 있다. 부모 지원을 늘리고, 육아 및 공교육 인프라에 투자하고, 노동시간을 줄이면 된다. 또 주거보조를 확대하고, 가족지원예산을 늘리고, 차별적 관행에 사회적 벌을 줘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해볼 만하고, 결국 해야 할 일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웃 일본이나 유럽 수준의 속도와 강도로 저출산을 겪어내고 있는 거라면 고민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하지만 0.72명은 다르다. ‘집단 자살’이라는 평가가 나온 극단적 수치는 차원이 다른 질문을 던진다. 한국 청년들은 아이 낳을 여건이 안된다는 이유만으로 부모 되기를 포기한 걸까. 일자리와 집이 생기면 그때는 아이를 낳을까.

“나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데 자식을 어떻게 낳나” “애가 싫어서 안 낳는 게 아니라 낳지도 않은 아기를 너무 사랑해서 낳기 싫은 것” “이 고통은 나에게서 끝”. 저출산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우리 사회가 놓친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수동적인 출산 포기를 넘어서는 능동적 거부. 그 밑바닥에는 불행의 감각이 흐른다. 삶이 피곤하고 불안하다는 느낌, 상시적 위기감이다.

한가한 얘기라고 할지 모르겠다. 한국인의 삶이 어느 세대라고 느긋했을까. 그래도 어른세대는 견딜 만했다. 기쁨을 대가로 기적이라도 이뤘으니까. 그게 산업화든, 민주화든. 청년들은 기쁨을 내주고 뭘 얻었을까. 이미 풍요로운 세상에 태어난 그들에게는 삶의 모든 단계가 경쟁, 그것도 아무 데로도 데려가지 않는 무의미한 줄서기의 연속이었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유치원과 학원에 줄을 서고, 자소서에 인생을 맞추고, 대학 강의조차 클릭 경쟁을 하고, 정규직을 잡기 위해 인턴에 지원하고, 그 인턴 기회를 위해 또 다른 인턴에 줄을 서야 했다.

게다가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특히 아이들 삶이 그렇다. 지난해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보고서가 그려낸 대한민국 평균 아동은 ‘더 오래 공부하고, 더 자주 혼밥하고, 덜 자고, 더 피곤하며, 그래서 더 불행한 아이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보고서에 대한 집단적 무관심. 내심 우리 모두는 입시경쟁의 생존자들이어서 한국에서 살아가자면 학업 스트레스는 상수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어쩌겠어.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내가 내 아이를 보며 느낀 무력감과 체념 그대로, 어른들 모두가 고단하고 불행한 아이들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

없는 일 취급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불행에는 결과가 따라온다. 휴식과 놀이, 수면 같은 기본권을 박탈당한 아이들은 불행한 청년으로 자라나고, 불행한 어른은 불행의 연쇄 고리를 끊을 유일한 선택을 했다. 부모가 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한 나라의 불행한 청년이 내린 가장 합리적 선택.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