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차라리 비례대표를 없애는 게 낫다

[고승욱 칼럼] 차라리 비례대표를 없애는 게 낫다

입력 2024-03-20 04:20

전문가·취약 계층 대변 위해
지역구 보완하는 게 비례대표

그러나 당원 뜻 반영 못한 채
정치헌금과 충성심에 좌우돼

과거 잘못된 관행 못 바꾸고
특정 세력 국회 진입에 악용
이런 제도 유지할 필요 있는가

유권자가 지역구 후보와 정당에 1표씩 투표하는 1인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2004년 17대 총선부터 국회의원 선거에 도입됐다. 그 전에는 전국구라고 불렀다. 지역구로 당선된 의원수에 비례해 전국구 의석을 나누는 방식이어서 1인1표 비례대표제라고 했다. 2001년 7월 헌법재판소는 이 제도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만 선택했는데, 그 후보가 속한 정당이 임의로 정한 누군가가 덩달아 의원이 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나온 게 지역구 후보와 정당에 2번 투표하는 지금의 방식이다.

전국구는 정치 경험이 없는 전문가를 발탁하고, 배려가 필요한 소수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점도 많다. 돈만 내면 된다고 해 ‘전(錢)국구’로 불린 게 대표적이다. 공천권자에게 충성을 다하면 쉽게 의원이 되는 건 더 큰 문제였다. 처음 시행된 1963년 총선에서부터 이 단점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공화당은 당총재인 박정희 대통령이 ‘능력과 논공행상, 지역구 사정을 고려해’ 전국구 의원을 낙점했다. 5·16 쿠데타 직후 야권 인사들이 만든 제1야당 민정당은 ‘원내 투쟁과 당 운영에 필요 불가결한 정치요원 확보’를 위해 전국구를 뽑았다. 유권자의 선택권은 아예 고려되지 않았다. 유신시대 폐지됐던 전국구는 1981년 제5공화국에서 다시 부활하면서 정치자금 조달 통로로 자리 잡았다. 정치와 무관한 재력가가 늘 당선권에 들어갔다. 전문직과 정치 소외 계층을 대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선거 때마다 기준이 달라졌다. 정당 민주주의가 없으니 당원의 뜻이 반영될 수 없었다. 제왕적 총재와 당권을 장악한 특정 계파의 특권일 뿐이었다.

비례대표는 유권자의 표를 의석에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나라마다 사정이 달라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소수의 지지만으로 전부를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폐해를 막고 유권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취지는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전국구라는 이름으로 도입되면서 비례대표는 정치엘리트가 무지한 국민에게 베푸는 선물로 둔갑했다.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여성 의원이 훨씬 많아야 한다는 데 공감하지만 누구를 어떤 절차로 국회에 보낼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 여성 몫의 전국구 의석 앞에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명망가들이 줄을 선 적이 있다. 물론 공천 여부는 권력자와의 친소 관계에서 갈렸다.

이번 총선은 최악의 비례대표제가 실시된 선거로 남을 것이다. 거대 정당을 견제하고 다양한 소수 정당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거창한 취지는 위성정당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거대 양당은 의원 꿔주기라는 구태를 되풀이하며 정당보조금까지 추가로 챙겼다. 공천 과정과 결과도 매한가지다. 국민의힘은 과거 전국구 의원 선발 방식을 답습했다. 한국 정치의 미래를 고심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명단이 발표되자마자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난하는 친윤계의 반발까지 터져나왔다. 과거 비례대표 공천은 늘 계파 갈등의 빌미였는데 이번에도 다를 게 없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더불어민주당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명분으로 내세운 시민사회와의 연대는 시대에 뒤떨어진 친북세력에게 국회 입성의 길을 터줬을 뿐이다. 비난이 쏟아지고 선거에 미칠 악영향이 생각보다 커지자 부랴부랴 일부 인사를 교체했지만 끝내 달라진 건 없다.

게다가 비례대표를 ‘비사법적 명예회복’의 수단으로 격하시킨 조국혁신당이 있다. 최근 유럽에서는 비례대표제가 극단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류로 진입하는 경로로 악용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학자들은 이를 비례대표제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는다. 세력이 미미한 극우 정당이 전국에 산재한 극우주의자의 표를 모아 정권을 잡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갓 시작한 우리나라에서 곧바로 현실이 됐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위선 정도는 ‘반윤’의 깃발 아래서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는 강성 지지층이 비례대표제의 허점을 뚫었다. 과거 군사독재시대 독재자의 입맛에 맞게 고안된 제도의 폐해를 답습하고, 다당제를 하겠다며 기형적으로 급조한 제도의 허점까지 껴안은 비례대표가 앞으로 4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한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비례대표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게 낫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