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대놓고 ‘복수’를 말하는 선거

[태원준 칼럼] 대놓고 ‘복수’를 말하는 선거

입력 2024-03-22 04:20

트럼프가 복수 공언한 美 대선
韓총선서 같은 일 벌어지는 중

조국이 꺼내든 1∼3호 공약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
노골적인 복수 의도 담겨

극단적·퇴행적 주장에
정치의 자리를 내줄 순 없다

총선판에 등장한 조국을 보면서 나는 트럼프를 떠올렸다. 다시 대선에 뛰어든 트럼프는 8년 전, 4년 전보다 조금 더 미쳐 보였다. 2016년 유세 때 지지자들에게 했던 “내가 당신의 목소리(I’m your voice)”란 말을 이번엔 “내가 당신의 복수(I’m your retribution)”라고 변주해 거침없이 외쳐댔다. “내가 당신의 전사이고, 당신의 정의이며, 당신의 복수다.” 그가 말하는 복수는 자신이 이긴 선거(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를 빼앗고, 자신의 범죄 혐의를 들춰낸 바이든 정권을 향하고 있다. 당선되면 특별검사를 임명해 바이든을 처벌하리라 공언하며, 공약집에도 각종 보복 조치를 보란 듯이 담았다. 상대에 대한 개인적 분노를 지지층에 전이시켜 증오와 응징의 선거판을 만드는 전략. 이렇게 노골적인 복수 마케팅을 본 적이 없는데, 조국이 지금 그것을 하고 있다.

그는 조국혁신당의 1호 공약으로 ‘한동훈 특검법’을 꺼냈다. 한동훈은 조국이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이었다. 특검 수사 대상으로 제시한 세 가지 중에는 딸 논문 대필 의혹도 있다. 두 번째 공약은 ‘김건희 종합특검법’.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사한다는 뜻에서 ‘종합’이란 말을 붙였다. 세 번째는 ‘윤석열 대통령 관권선거 국정조사’로 윤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민생토론회를 선거운동으로 규정해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1~3호 공약의 구성부터 “나와 내 가족이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는 메시지를 보란 듯이 담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석열 정권 조기 종식” “총선 후 첫 과제는 대통령 처벌” “1차 목표는 윤 정권 레임덕, 2차는 데드덕” 등등 더 노골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지지자들에게 복수의 대열에 합류하라 재촉하고 있다.

트럼프는 “내가 지면 미국은 피바다가 된다”거나 “이주민은 짐승들”이란 식의 거친 말을 숱한 비판에도 멈추지 못한다. 선거판에서 가장 극단적인 키워드 ‘복수’를 꺼내든 터라 열광한 지지자들을 계속 붙잡아두려면 그에 버금가게 자극적인 언어가 필요해서 그렇다. 조국도 그럴 것이다. 20일 남은 투표일까지 그의 유일한 선거 전략인 복수 메시지는 계속 수위를 높여갈 게 분명하다. 27년 전 대선에서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김대중)”는 선언이 나오고 그것이 지켜졌던 한국 선거판은 세월이 흐를수록 거꾸로 퇴보했다. 이명박 정권의 노무현 수사, 문재인 정권의 적폐 청산이 진영 사이의 골을 깊이 파놓더니 이제 공공연히 복수를 외치는 지경에 왔다. 선거를 종종 전쟁에 빗대지만, 그 본질은 경쟁이다. 실제 전쟁에서도 복수는 개전의 명분이 될 수 없는데, 하물며 비전과 정책을 경쟁하는 선거를 복수의 무대로 삼는다? 정상적인 정치인의 사고일 수 없다.

불행히도 조국의 극단적인 메시지가 선거판에서 먹히는 모양이다. 열 몇 석을 얻으리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는 다른 정당들이 조국의 복수를 압도해 유권자의 귀를 붙잡을 만한 이야기를 내놓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지금까지 발견되는 총선 키워드는 오직 ‘이재명’이었다. 숙청하듯 반대파를 쳐내는 비명횡사 공천으로 완벽한 친명체제를 만들었다. “민주당은 이재명당이 됐다”는 메시지 말고 유권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나. 오히려 조국당의 지지율이 높아지자 벤치마킹하듯 이 대표도 ‘탄핵’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다닌다.

국민의힘에서 유권자가 듣는 이야기는 주로 갈등과 리스크였다. 김건희 리스크에 윤석열-한동훈 갈등이 터져 나왔고, 이를 봉합했더니 이종섭·황상무의 용산 리스크가 다시 갈등을 불렀다. 그 사이 한동훈에게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때 지지율이 반등했지만 요즘은 “힘이 달리는 것 같다”는 평이 나온다. 같은 얘기를 너무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의 주된 테마인 ‘이재명 민주당’의 문제점은 이제 다들 아는 거여서 귀에 꽂히지 않게 됐다. 제3지대는 제대로 목소리를 내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해졌다. 새로운 정치를 한다더니 이합집산과 자리다툼, 공천 갈등과 잇단 결별의 구태를 다 보여줬다.

선뜻 기대할 곳이 안 보이는 암울한 선거판이 됐지만, 그래도 대놓고 복수를 말하는 정치에 자리를 내줄 순 없는 일이다. 정치의 양극화를 넘어 희화화하는 이런 일이 통한다면 다음 선거에선 더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아직 20일이 남았다. 누구든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보라.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