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우리가 무시했던 일본 경제의 비상

[여의춘추] 우리가 무시했던 일본 경제의 비상

고세욱 논설위원

입력 2024-03-29 04:09

한국이 애써 낮춰 본 日 경제
2010년대 와신상담 내실 기해
17년 만 금리인상에 부활 신호

일본 떠오를 때 韓 경제는 퇴보
정부 국회, 경제혁신 나몰라라
일본이 우리 조롱하게 생겼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무시하는 나라’로 불린다. 아무래도 민족 감정 때문일 게다. 일본과의 비교 우위를 강조하는 국뽕 유튜브는 차고 넘친다. 일본 경제와 기업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경제규모로 40년간 미국 다음 부동의 2위였고 다소 후퇴하긴 했어도 여전히 세계 4위의 부국이며 기초과학과 제조업의 강자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을 ‘잃어버린’ 10년, 20년, 30년 등 수치만 바꾼 채 저성장의 병든 환자 취급해왔다.

일본의 상징 중 하나가 소니다. 혁명적 기기 ‘워크맨’으로 1970년대 말 이후 세계 전자제품시장을 평정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디지털 혁명, 모바일 전환에 뒤처졌고 삼성전자가 시장 주도권을 차지했다. 국민들은 삼성전자에 환호를, 소니에 조소를 보냈다. 2000년대 중반 독일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IFA)에 취재차 갔을 때다. 소니 부스에 들렀는데 절차 문제로 제대로 관람하지 못했다. 동행한 모 기업 관계자가 말했다. “망해가는 기업이 까다롭게 구네.”

일본의 일부만 보고 비웃을 때 일본은 조용히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2012년이 일본 경제의 변곡점 아니었나 싶다. 반도체 시장 2위 엘피다가 파산하고 수렁에 빠진 소니의 소방수로 히라이 가즈오 전 회장이 등판했으며 고(故)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한 때다. 반도체, TV 강국이 바닥까지 추락한 뒤 아베노믹스를 통해 면모를 일신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베노믹스 뼈대인 양적 완화와 재정 확대, 구조 개혁의 ‘3개 화살’이 경제 회복이라는 과녁을 조준했다.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탈출이 쉽지 않았지만 개혁 정책이 10여년간 일관되게 이어지자 수출경쟁력 강화, 기업 실적 개선이 고개를 들었다.

일본 중앙은행이 지난 19일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2007년 이후 17년 만이다.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3.1% 올라 41년 만에 최고였고 올해도 2%대 상승이 예상된다. 올해 대기업 평균 임금 인상률은 5.28%로 집계돼 91년 이후 가장 높을 전망이다. 고질적 저물가, 저임금 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금리인상으로 나타났다.

비상하는 일본과 달리, 한국 경제는 미로에 갇힌 모습이다. 묘하게도 일본 경제의 사이클과 대조를 이룬다. 일본 정부·기업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도약을 꿈꿀 2010년대 초 한국 경제는 정체의 터널에 진입했다. 90년대 이후 중국 시장 선점, 발빠른 디지털 경제 적응으로 세계화의 우등생으로 떠오른 데 안주했다. 고령화 저출산의 외풍이 불고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극복 때 ‘할 수 있다’로 하나된 국민 결집은 2010년대부터 정치권 진영 논리, 갈등의 극대화로 자취를 감췄다. 2010년대 잠재성장률은 2.1%로 2000년대(3.8%)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한국 경제의 얼굴은 삼성전자다. 가전에서 소니를 제쳤고 메모리반도체 집적도가 1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을 이끌며 2000년대 반도체 절대 1강의 위세를 떨쳤다. 98년부터 2013년까지 매출이 연평균 약 18% 성장했다. 공교롭게 2013년부터 게걸음이다. 반도체, 휴대전화, 가전에서 두루 지배력을 다진 다각화가 어느 한 분야 특출나지 않은 평범화로 바뀐 시점이다. 1위 자리가 타성을 만들었고 쇄신에 굼뜨며 인공지능(AI) 흐름을 놓쳤다. 2013~2023년 매출 성장률은 연평균 1%대로 추락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성장률(1.4%)은 98년 이후 25년 만에 일본(1.9%)에 밀렸다. 소니의 영업이익이 삼성전자를 역전한 것도 99년 이후 지난해가 처음이다. 올 초부터는 국내 주식시장에서 일본식 상장사 가치 제고(밸류업) 프로그램을 본받자는 캠페인이 뜨겁다. 무시 받던 일본 경제의 반전이다.

일본 경제는 내친 김에 가속도를 밟고 있다. AI 시대에 맞춰 대만의 TSMC와 손을 잡고 일본답지 않은 빠른 의사결정과 보조금 지원으로 반도체 명가 재건에 나섰다. 반면, 우리는 도통 위기감이 없다. 정부는 기술전쟁의 실탄 격인 ‘연구개발(R&D)’ 예산을 깎았다. 미·중 갈등, 일본의 부활로 생사를 건 글로벌 혁신 경쟁이 치열한데 선거에선 ‘복수’ 소리만 들린다. 퍼주기 외엔 경제 체질 개선 공약은 눈에 띄지 않는다. 비룡(일본)의 비웃음이 보이는 듯하다. 한국 경제 추락을 조롱하는 유튜브가 일본에 넘칠 것 같다. 가슴 아픈 노릇이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