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가수에서 목회자로 인생역전… “북한 복음화 위해 기도해요”

[나와 예수] 가수에서 목회자로 인생역전… “북한 복음화 위해 기도해요”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일대교구
오애숙 선임 목사

입력 2024-04-0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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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가수 오방희로 활동하다 생사를 넘나드는 교통사고를 당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나 목회자가 된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일대교구 오애숙 목사.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오 목사는 “많은 탈북민이 진정 성령으로 거듭나 주 예수의 제자가 되어 북한을 복음화하는 일에 쓰임 받는 십자가 군병들이 되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다. 장진현 포토그래퍼

1980년대 잘 나가던 가수 오방희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 목회자가 된 오애숙(65)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일대교구에서 사역하고 있는 오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모태신앙이긴 해도 가수 할 때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화려한 생활을 해도 감사가 없었어요. 맨날 짜증만 내고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들이 나를 몰라주고 때로는 우습게 봐도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저한테 샬롬과 희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목사는 가수로서 화려한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큰 사고를 당한 후 좌절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났다. 세상의 부귀영화만을 좇았다던 그의 과거. “오직 하나님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치다 가는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하는 현재. 최근 만난 오 목사는 극적인 인생 변화 과정을 들려줬다.

하나님만 의지했던 어머니

오 목사에게 어머니는 늘 신앙의 버팀목이었다. 충북 청원군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오 목사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당시 남편이 없으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겨졌다. 시대 분위기였고 시골 마을은 더더욱 그랬다. 오 목사는 “엄마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오직 교회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우시며 기도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오 목사의 외갓집은 큰 부자 집안으로 외할머니는 마을에 교회도 세울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신앙 집안에서 나고 자란 오 목사의 어머니는 텃밭에서 키운 시금치와 오이 등을 처음 수확하면 제일 잘생긴 것을 교회에 가장 먼저 가져갔다. 오 목사는 “시골 교회 목사님을 주님처럼 섬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세상 부귀영화를 좇던 오방희

오 목사는 어려서 교회 가는 것이 재밌고 좋았다. 목사님은 내내 숨겨두셨던 과자와 사탕을 주일이면 내 주셨다. 성탄절이면 찬송과 성극에 참여하면서 노래 잘 부른다고 칭찬도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서도 꾸준히 교회에 다니던 오 목사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교회 가는 것이 재미가 없어졌다. 오 목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주일에 예배만 다니다 보니 타성에 빠졌다”면서 “마음 한쪽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잘 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에 대한 반항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남몰래 가수의 꿈을 키워 온 오 목사는 고등학생 때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도하는 믿음의 엄마를 존중하지 않고 소중한 줄도 모르고 세상의 명예와 부귀영화만을 꿈꾸며 가수가 꼭 되겠다고 결심했다”면서 “그것이 제 인생의 성공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 작곡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직접 음반 회사를 찾아다니며 오디션도 봤다.

가수 오방희로 활동하던 시절 잡지사 요청으로 야외에서 찍은 사진.

마침내 1978년 첫 음반을 내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가 됐다. ‘미리내’ ‘꽃씨’ ‘내 마음을 아세요’ 등 연이어 히트곡을 냈다. 당시 건전가요 붐 속에 오방희의 ‘무궁화’도 큰 인기를 누리며 오 목사는 방송국과 야외녹화장을 숨 가쁘게 뛰어다녔다.

건전가요 ‘무궁화’가 수록된 앨범.

오 목사는 “그때 주택복권 생방송이 주일 오전 11시에 있었는데 교회가 아니라 방송을 선택했었다”면서 “이후 점차 주일예배 참석도 소홀히 했고 엄마는 그런 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걱정하며 늘 기도하셨다”고 말했다. 교회는 잘 나가지 않았지만 오 목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그리움은 늘 있었다. 밤무대를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늘 차 안에는 성경책이 있었고 가끔 혼자 찬송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큰 사고 후 회개의 눈물

세상에 취해 정신없던 85년 2월 어느 날 KBS 울산방송국 개국 기념 쇼에 출연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새벽이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 큰 돌덩이가 있었고 그걸 피하다 차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오 목사는 뇌를 크게 다쳐 의식불명인 채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언론에서는 “오방희가 죽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고 한다. 의사는 살아도 식물인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성도와 연예인들로 구성된 ‘믿음의선교단’ 회원들의 중보기도가 이어졌고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의식을 찾은 오 목사는 믿음의선교단이 두고 간 설교 테이프를 듣게 됐다. 조용기 목사의 설교였다. 귀에 꽂히는 한 마디가 있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모태 신앙인이라면서도 그동안 말씀도 모르고 주님이 살아계심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부귀영화에 온갖 정력을 기울이며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어요. 회개의 눈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며 저도 모르게 찬양이 흘러나왔어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오 목사는 부축을 받아가며 전국 교회를 돌며 하나님을 간증하고 찬양을 드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잘했다고 칭찬하실까’라는 질문을 했다.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도만 하면 늘 눈물만 쏟았다. 어느 날 기도원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오 목사는 “집 앞 은행나무 잎사귀가 반짝거리며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인생의 특권을 부여받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았다”면서 “이제는 세상의 일들이 너무나 덧없이 보이고 하나님나라를 위하는 영원한 일에 내 삶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교회에는 다녔지만 성경을 잘 읽지 않았던 오 목사는 거듭난 이후 정말 말씀이 꿀송이같이 달게 느껴졌다. 출석하던 교회 전도사님은 신학 공부를 권유했지만 처음엔 선뜻 답을 못했다. 기도하던 중 하나님은 “네가 준비한 만큼 쓰겠다.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쓸 수가 없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다. 오 목사는 ‘준비하는 마음’으로 신학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영산신학원에 입학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권사 안수를 받은 어머니 정옥진 권사와 함께한 오 목사.

그는 “처음 시작하면서 너무 힘들다고 불평도 많이 했지만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 은혜 가운데 계속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 불타오르는 아쉬운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오 목사는 91년 졸업 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미국 리젠트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2000년 어머니 정옥진 권사가 돌아가시기 전 전도사 사역을 그만뒀고 이후 역시 리젠트대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한선교 사역에 나서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일본 아프리카 인도 등에서 해외 선교 활동을 하던 오 목사는 평소 친분이 있던 한 목회자로부터 자신의 교회에서 사역해 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몇 번을 사양하다 받아들였는데 목사님은 ‘반강제적으로’ 북한선교를 맡겼다. 처음에는 사상과 살아온 배경이 다른 탈북민을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오 목사는 “솔직히 정말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고 울면서 ‘왜 내가 이런 사역을 해야 하느냐’고 하나님께 하소연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주님은 이런 응답을 주셨어요. ‘너도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그들보다 다른 게 무엇이겠니. 사상이 다르고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 안에서는 크든 작든 죄는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라고는 겉으로 드러나느냐 포장해서 안 드러나느냐의 차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오 목사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주시니 어쩌면 그들보다 남한에서 태어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내가 오히려 더 마음속으로는 죄를 짓는 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순종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1의 기도제목은 북한 복음화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일대교구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로 왼쪽부터 김대성 김정대 오애숙 임명희 목사.

10년 가까이 탈북민사역을 하던 오 목사는 2022년 친정인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복귀했다. 또 한 번 탈북민선교를 담당하는 통일대교구 선임 목사로 사역 중인 오 목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다시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탈북민들 사역을 다시 맡기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오 목사는 보이지 않는 열매를 맺는 것에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한 탈북민은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다른 탈북민은 자신을 핍박하던 남편이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을 때 “할렐루야”를 외쳤다.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일대교구에서도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오 목사가 처음 부임할 때만 해도 30~40명이 예배드렸는데 현재는 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재적이 800명이 넘고 주일 예배에 500여명이 참석하고 있다. 오 목사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북한 복음화다. 오 목사는 “많은 탈북민이 진정 성령으로 거듭나 주 예수의 제자가 되어 북한을 복음화하는 일에 쓰임 받는 십자가 군병들이 되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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