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진리에 대하여

[바이블시론] 진리에 대하여

한병수 (전주대 교수·선교신학대학원장)

입력 2024-04-12 04:06

성경에는 역사와 문학과 정치와 경제와 법률과 묵시가 골고루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책은 기독교 진리를 구성함에 있어 의미의 고유한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특정 부분이나 주제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사람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의미나 강조점의 불균형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대하는 안구의 조리개를 느슨하게 풀었다가 팽팽하게 조이는 지속적인 반복으로 진리의 부분과 전체에 적정한 비율의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는 모든 시대에 깨끗한 입을 찾고 모든 분야에서 체형에 맞는 언어를 취합니다. 진리는 타협적인 덧셈과 뺄셈을 좋아하지 않고 삐딱한 부등호와 친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는 호기심과 의구심의 등골에 식은땀이 구르도록 명료하고 쉽습니다. 동시에 진리는 상식과 합리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 어깨너머에 있습니다.

상식과 합리의 막강한 권한은 진리를 수종 들기 위해 주어진 겁니다. 진리는 이성의 땀을 원하지만 이성의 지분 요구엔 난색을 보입니다. 이성은 진리가 지나가는 길인데 영광인 줄 모르고 통행료를 요구하는 건 본분을 망각한 짓입니다. 진리를 상품처럼 진열하고 가격표를 붙이는 자본주의 시대의 광기가 교회의 경건한 회계장부에도 둥지를 짓습니다. 어느 작가는 진리가 스스로 말하도록 언어 통제권을 통째로 넘긴 게 시라더군요.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세상은 비유의 샘입니다. 시인은 그 비유에 문학적 감각을 기울여 듣습니다. 비유에 담긴 진리는 단선적인 게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뽑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붓 대신 수금을 잡습니다. 수금이 오묘한 말의 매듭을 조잘조잘 풀어 주목하는 자의 귀에 넣습니다. 그들은 예술적 감각으로 진리를 듣습니다. 비유와 수금 예술은 논리적 언어의 진술로는, 문서의 평면적 풀이로는 담아낼 수 없는 진리의 심층을 꺼내고 대중과 소통하는 기술인 듯합니다. 저도 오늘 만나는 비유에 귀를 주고 오묘한 말을 담은 곡조 하나 뽑고 싶습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선을 도모하는 자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입니다. 성품의 온도가 늘 영하인 인생이 회복되는 비결은 선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진리가 몸을 숨기고 거짓만 겹겹이 쌓입니다. 귀는 거짓을 환대하고 입은 속임수의 전용 출구로 변합니다. 선을 도모하면 신기하게 진리를 만나고 진리가 보이고 진리가 들립니다. 선을 도모하는 나라에는 인자가 문화이고 진실을 목숨처럼 여깁니다. 악을 도모하는 나라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거짓이 국정운영 철학의 지위를 얻습니다.

진리와 사랑은 어깨를 걸고 있습니다. 진리의 엄밀성은 자신을 향하고 사랑의 포용성은 타인을 향하는 게 정상인데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진리에 대한 입장이 조금만 다르면 틀리다는 송곳부터 세웁니다. 진영의 논리에 사로잡혀 진리의 가위질도 서슴지 않습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무한하므로 하나의 교단이나 계파의 신학적 범위 안에 결코 다 구겨 넣을 수 없습니다.

가라지 뽑다가 알곡까지 건드려서 진리에 혹은 하나님 나라에 흉터가 생길까봐 주님은 추수 때까지 두라고 하십니다. 형제를 고치려고 메스를 들이대는 것보다 사랑으로 품어주면 마술처럼 낫습니다. 눈물의 밴드를 발라주면 서서히 아뭅니다. 말씀을 맡았던 유대인이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는 광기를 부렸듯이 진리를 아는 자들이 괴물로 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겸손하고 온유하면 좋겠습니다.

한병수 (전주대 교수·선교신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