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할머니의 말

[살며 사랑하며] 할머니의 말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입력 2024-04-12 04:07

카페 옆자리에서 할머니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봄을 데려오는 게 뭔지 아니? 바람이야. 바람.” 그 말이 내면에 뭔가를 쓱 긋고 지나갔다. 손자로 보이는 아이는 휴대전화 액정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도 아니고, ‘바람이 봄을 데려온다’라니. 다름 아닌 시인이 내 옆자리에 앉아 계셨다. 아이는 할머니의 말을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창밖의 버드나무를 눈으로 어루만지듯 보았다. 봄을 맞아 새로운 길을 내는 자연의 순환을 좇는 듯한 눈길이었다.

아이는 자라서 할머니가 해준 말을 기억할까. 아마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내가 어머니께 들었던 무수한 사랑의 말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할머니는 그저 따사로운 봄날, 손자에게 ‘고운 말’을 들려주고 싶었을 터이다. 말뿐인 것은 힘이 없다고 누군가는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말에는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순환하는 자연의 리듬을 부드럽게 따라가는 말,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손이 ‘괜찮다’고 등을 다독여 주는 것 같은 순정한 말이다.

할머니가 바라보던 창밖의 버드나무는 한 아름이 넘는다. 어쩌면 할머니보다 더 오래 산 나무인지도 모르겠다. 한자리에서 여러 번의 계절을 지나온 버드나무의 일생에 할머니의 얼굴을 포개본다. 봄볕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의 물결을 보노라니 기억이 잠시 다른 세상으로 여울져 흘러가는 듯하다. 가끔 사랑받았던 말보다 상처받았던 말을 더 오래 붙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서운한 말 한마디는 열 가지 고운 말을 지우는 앙금이 되기도 한다. 나중에 나는 어떤 말을 기억으로 채우는 할머니가 될까. 부디 상처에 골몰하기보다 사랑받은 말을 칸칸마다 고이 접어 간직하는 사람이기를 소망한다. 저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시와 같은 말처럼.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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