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약자의 눈물을 닦는 교회

[바이블시론] 약자의 눈물을 닦는 교회

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

입력 2024-04-19 00:34

구약의 여러 책에 나오는 약자에 관한 규례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하나님은 약자를 돌보라는 명령에 더해 구체적인 지침을 주신다. 추수할 때 곡식단을 옮기다 떨어진 이삭은 줍지 않아야 하고, 열매를 딴 후에 가지에 남은 것이 없나 다시 살피면 안 된다. 내가 곡식과 열매를 거두어 가난한 이에게 주어도 될 텐데 받는 이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날이 어두워진 후에 직접 가져가게 하는 것이다. 남은 이삭과 열매는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몫을 자기 노동으로 당당히 얻게 된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도 빈부의 차이에 따라 제물을 정한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양을 잡아 바쳐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바치거나 그것도 힘들어서 곡식 가루를 바쳐도 똑같은 제사로 받아주신다. 가난하면 사람에게 멸시를 받을지 모르나 크신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할 일은 없는 것이다. 안식일에 종과 동물의 노동을 금하거나,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다시 보내지 말라는 명령도 하나님이 약자를 편애하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유와 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무엇을 빌릴 때도 자신이 있다. 다시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당연히 대범하고 시원시원하다. 걱정할 일이 없으면 남에게도 너그러워지고 앞뒤를 살펴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 반면 열악하고 위험하고 억울한 위기 상황에 처하면 누구든 위축되고 작은 일에도 상처 받는다. 대단한 성취는 지레 포기하고, 모든 에너지를 본능적으로 자기 보호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합리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이고 쓸데없이 민감해 보인다. 하나님의 시시콜콜한 배려는 이런 약자의 모습을 잘 아시는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

세월호가 온 국민의 눈앞에서 침몰한 지 10년이 흘렀다. 모두가 슬퍼했지만 그 슬픔이 참사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이어진 시간은 참 짧았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절규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정치적 행동으로 낙인찍혔고, 이후 애써 만들어진 조사위원회들에는 가능한 진상을 감추고 축소하려 노력하는 방해자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런 자세한 정황은 모두 잊히고 “여러 번 조사한 걸 또 하자고 한다”거나 “유가족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만 난무한다.

지난 세월 동안, 세월호 유가족, 이태원 참사 희생자 가족을 돌보는 데 자신의 힘과 시간을 바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기독 교회 전체로 보면 우리가 과연 성경의 규례가 보여주는 세심함으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슬픔을 어루만졌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을 잃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좀 차분해지라고, 차근차근 말하라고, 했던 말 또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는가. 소리치지 않아도 들리니 조용히 하라고, 슬프다고 말하려면 잠시도 웃지 말라고, 시간이 지났으니 잊으라고 하지는 않았는가. 혹은 남이 그리 말할 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적은 없는가.

내 자식이 그 배에 타거나 그 거리에 있지 않았다는 우연한 사실이 나를 강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흔들리지 않는 객관의 자리에 앉아 조사위원회를 꾸렸으니 된 것 아니냐, 보상을 받았으니 끝난 것 아니냐 묻는다. 율법을 받은 부자들도 먹을 것을 직접 나눠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같은 제사면 제물도 같아야 하지 않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훨씬 섬세하고 깊은 자비로 우는 자의 편에 머무시고 우리에게 그들과 함께 울라 하신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으며 한국 교회에 부여된 큰 숙제는 약하고 억울한 이웃의 자리에 함께 서서 그 아픔에 공감하고 그 눈물을 닦을 방도를 애써 찾는 것이다.

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