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100만원어치 아일릿 앨범

[여의춘추] 100만원어치 아일릿 앨범

김지방 디지털뉴스센터장

입력 2024-05-10 00:38

민희진 어도어 대표 말이 맞다
K팝 아이돌, 노래를 파는가
고가의 포토카드를 파는가

이런 비정상, 시장 교란하고
팬들에게 덤터기만 씌워

그러면 K팝은 도대체 뭔가
팝음악? 팝업스토어?

‘위버스’라고 적힌 상자 여러 개가 거실에 쌓여 있었다. 지난 3월 어느 날 우리 집 풍경. 위버스는 하이브가 만든 팬 커뮤니티 플랫폼이다. 상자 안에 든 물건은 걸그룹 아일릿 데뷔 앨범 100만원어치였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뉴진스 카피해서 나왔다”고 했던 그 5인조 걸그룹이다.

고등학생인 딸이 용돈과 세뱃돈을 모아서 저지른 일이었다. 포토카드 때문이라 했다. 아일릿 멤버는 다섯 명이다. 포카는 각자 4장씩 모두 20종류. 앨범 하나에 2장씩 들었다. 100만원어치나 산 이유가 있었다. 일정 금액 이상 앨범을 사면 미공개 포카(미공포)를 준다. 딸은 포카 세트를 완성하고 미공포를 확보했다. 나머지 카드와 앨범은 되팔겠다는 계산이었다.

혀를 차는 아버지에게 딸은 아일릿은 그나마 양심적인 편이라고 항변했다. 아일릿 앨범엔 사진이 세트별로 겹치지 않게 들어 있고, 앨범도 A타입과 B타입을 구별해 사행성을 낮췄단다.

어떤 아이돌그룹은 13명 멤버가 각자 4장씩 52종류의 포카를 만들었다. 수백만원어치를 사도 포카를 다 얻기 어렵게 만든 셈이다. 팬들은 인기 아이돌 멤버의 포카를 앨범값의 몇 배에 사고판다. 포카 가격을 두고 멤버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벌어진다. 민 대표는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모습을 비판했다. “저는 (K팝) 업계에서 그런 랜덤 카드 만들고 밀어내기를 하고 이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 여러분, 이게 업에 좋아요? 그 창작의 뭐(대가) 이런 걸 떠나서 그냥 상도에 안 맞아. 소비자들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이게 뭐냐고, 도대체.”

희대의 기자회견에서 그가 2시간 넘도록 쏟아낸 얘기 중에 경영권 분쟁이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팀 모자 같은 게 화제가 됐지만, 10대 팬을 둔 이 아버지는 그런 데 관심 없다. 포카 이야기에 꽂혔다. 포카 밀어내기를 비판한 대목은 팬들과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고치면 좋겠다.

K팝 아이돌 앨범을 살펴보면 노래를 파는지 포카를 파는지 헷갈릴 정도다. 아일릿 데뷔앨범 포카는 20종인데, 수록된 노래는 딱 4곡이다. 노래 한 곡 길이가 3분이 채 안 된다. 가장 짧은 ‘마이월드’는 1분47초로 미국 슈퍼볼 광고보다 짧다. 각 구성원들이 노래를 부르는 분량은 짧으면 23초, 길어도 36초다.

민 대표는 이런 포카 판매 관행이 앨범 판매량을 부풀려 시장을 교란한다고 반성했다. 팬들만 덤터기를 쓴다 생각했는데, 아이돌 구성원들도 힘든 줄 처음 알았다. 포카를 팔기 위해 팬 사인회를 계속해야 한다. 어떤 신인 그룹은 4개월간 75회의 팬 사인회를 했다고 한다. 1년간 92차례 사인회를 연 걸그룹도 있다. 이 정도면 팬도 아이돌도 지친다.

“(팬 사인회에) 가고 또 가야 한다. (팬들은) 앨범을 또 사고 또 사고. 이게 도대체 뭐야. 저는 지금 음반 시장이 너무 다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든요.”(민 대표)

포토카드 문화는 미국 담배회사에서 시작됐다. 담뱃갑 안에 끼워넣은 홍보용 카드가 메이저리그 프로야구와 결합하면서 거대한 산업이 됐다. 39억원에 거래된 포카도 있다. 일본이 이를 들여와 사행성을 극대화했다. 일본 연예기획사들은 무작위 포카와 팬 미팅 응모권을 가수의 앨범에 끼워넣어 수백장씩 사게 했다. 최근에는 포켓몬스터 유희왕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게임 캐릭터들의 포카가 비싸게 거래된다.

그러고 보니 K팝 비즈니스는 음악보다는 게임과 더 닮았다. 하이브 대표부터 게임회사 출신이다. 뉴진스의 엄마라는 민 대표도 노래가 아니라 비주얼 콘셉트를 만드는 일을 해 왔다. 하이브가 멀티레이블을 운영한다지만 흑인음악과 클래식 음악같이 장르별로 레이블을 나누는 음반회사 시스템과는 다르다. 아이돌그룹을 데뷔시켜 갖가지 굿즈(기념품)로 2∼3년 바짝 수익을 올린 뒤 다시 새로운 아이돌을 내놓는 방식은 게임회사가 여러 스튜디오를 두고 엇비슷한 게임을 계속 내놓는 전략과 더 비슷하다.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내가 현실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떨 땐 아이돌 구성원들도 가수보다는 셀럽이 목표인 듯 보이기도 한다. 조용필 산울림 김광석의 팬인 50대 아버지는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K팝이란 뭘까. 팝뮤직일까, 팝컬처일까. 아니면 혹시 팝업스토어?

김지방 디지털뉴스센터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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