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채 상병 사건과 보수의 가치

[데스크시각] 채 상병 사건과 보수의 가치

모규엽 사회2부장

입력 2024-05-16 00:38

현재 미국 보수주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샤론 선언문에는 ‘정부의 목적은 내부 질서의 보존, 국방, 사법 행정을 통해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고, 보수주의 사상을 가장 잘 구현했다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국방을 강조했다. 미 그로브시티칼리지 정치학 교수 폴 겐고르가 레이건의 보수주의 원칙에 대해 쓴 책 ‘레이건 일레븐’에는 ‘힘을 통한 평화’ 원칙이 있다. 이 같은 기조와 국가에 대한 봉사·헌신을 강조하는 미국적 가치가 합쳐져 미 보수주의에서 군인에 대한 예우는 대표적 덕목으로 자리잡았다.

군인에 대한 예우는 미국에서 보수를 넘어 국민 대부분이 응당 해야 할 일로 간주한다. 민주당 출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9년 아프가니스탄전 전사자 18구의 유해를 거수경례로 맞는 사진은 깊은 감명을 줬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후 첫 의회 연설에서 전몰 군인과 경찰 가족을 특별 손님으로 초대했다. 미국 법정 공휴일 중 이와 관련된 날도 두 개나 된다. 전몰 장병을 추모하는 메모리얼 데이와 재향군인의 날인 베테랑 데이다. 영화 ‘챈스 일병의 귀환’도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유해를 유족이 있는 곳까지 운구하는 게 줄거리다.

우리나라에서도 군인은 특별한 존재다. 분단국가로서 거의 모든 남성이 군인이 되어 청춘을 바친다. 자신뿐 아니라 자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이 군대에 가기에 관심이 남다르다. 난데없이 이 같은 보수주의의 가치를 들먹인 이유는 바로 ‘채 상병 사건’ 때문이다. 채 상병은 지난해 7월 경북 예천에서 수해 실종자 수색 작전에 투입됐다가 급류에 휩쓸려 순직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의 삶은 그렇게 안타깝게 마감됐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외압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 이달엔 특검법까지 통과됐다. 채 상병 사건의 핵심은 그의 죽음을 놓고 어느 선까지 책임을 지도록 할지, 그 가이드라인을 누가 만들고 지시했느냐로 보인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대한민국 보수의 대표라고 자임하는 정부와 여당의 모습이다. 채 상병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유일하게 진보 출신인 안철수 의원이 채 상병 사건 처리를 놓고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분께는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해드리는 것이 바로 선진국이고 품격 있는 나라”라고 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보수와 대척점에 있는 진보 정당인 민주당쪽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는 모습도 이색적이다.

사실 최근 정부·여당에선 보수의 가치를 외치고 연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MB정부 때만 해도 여러 논란이 있지만 뉴라이트 등과 같이 보수를 연구하고 행동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파적 유불리를 따지는 모습만 보인다. 보수와 진보는 각각 장점이 있다. 그 장점을 더욱 부각시키고 국민적 동의를 누가 더 얻느냐로 경쟁하는 게 정치와 정당의 본 모습이다.

여하튼 다른 여러 가지 사건은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채 상병 사건은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이 사건을 놓고 정부와 여당이 일개 사병의 죽음에 사단장 이상까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느냐고 생각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보수를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고 철저한 수사로 채 상병 유족의 아픔을 달래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따뜻함이다.

모규엽 사회2부장 hirt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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