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의 발견] 시장에서 보내는 삶의 안부

[로컬의 발견] 시장에서 보내는 삶의 안부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

입력 2024-05-18 00:31

얼마 전 편집부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의 내용은 담담했으나 보낸 이의 오래도록 성실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져 금세 마음속 불이 켜졌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그냥 그저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그 말이 정말인 것을 요즘엔 확실하게 느낀다. 내가 이 보성시장에 들어온 지도 어언 삼십년이 훌쩍 지났다고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또 뜨거워지기도 한다. (중략) 처음엔 국밥을 어떻게 할 줄 몰라 손님 한 분만 들어와도 안절부절 쩔쩔맬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중략) 결코 짧지 않은 삼십여년의 세월 하루하루가 다 소중한 추억이었고 내 삶의 전부였고 내 인생 소풍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편지를 보낸 이는 1972년 시작된 제주시 보성시장에서 30년 간 성실하게 순대국밥집을 운영한 현경식당의 홍춘열 할망. 올해 일흔일곱의 홍 할망은 편지에서 이제 일을 그만둘 나이가 되었건만 아침이면 으레 출근이 서둘러지는 걸 보면 아마 움직일 수 있는 한 순대국밥 말아내는 일을 쉽게 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고도 했다. 보성시장은 허영만 화백의 ‘식객’에도 등장하는 제주식 순대로 이름난 식당들이 모인 곳이다. 제주에서 순대는 결혼식이나 돌잔치, 집들이 등 대소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음식이다 보니 홍 할망도 일년이면 잔치용 순대 700~800㎏을 너끈히 담았다고 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남은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지난 삼십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불 앞에서 국밥을 끓이고 순대를 담아내며 온갖 사연의 손님과 마주했던 그녀의 치열한 삶이 담긴 네 장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정성들여 삶을 살았나를 생각해 본다. 삶이 지루하고 무료하게 느껴진다는 이른 아침 시장에 가보면 좋겠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같이 알록달록 보냉박스에 파며 생선, 달걀까지 배송해 주는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표선오일장 서는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김도양 두부장수의 두부를 기다리는 긴 줄이 늘어선다.

장 서는 날이면 1000명 상인이 모이는 제주시민속오일장 입구에는 65세 이상 할망만 좌판을 열 수 있는 할망장터가 북적인다. 적게는 20년부터 많게는 오일장이 탑동에 있었을 때부터 60년 동안 장터를 지켜온 베테랑 할망상인들이 각자의 우영팟(텃밭)에서 직접 기른 제철 채소와 뒷마당에서 딴 들쭉날쭉 과일을 파는 곳이다.

1963년부터 시장을 지켜온 84세 양복열 할망의 좌판에도 중산간에서 캐온 달래며 돌냉이 그리고 제주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팔삭이 한 무더기다. 일흔, 여든이 넘었어도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씩씩하게 최선을 다해 본인의 삶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시장이다. 시장에 가면 사람이 보이고 삶이 보인다. 그들의 찬찬하고 위대한 일상에 경의를.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삶의 안부를.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