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의대 증원, 이제 의사들이 물러설 때

[태원준 칼럼] 의대 증원, 이제 의사들이 물러설 때

입력 2024-05-17 00:50

의대 증원 근거 검토한 법원
정부 손 들어주는 판결
타당성·필요성 인정한 것

왜 의사 부족하지 않다는 건지
왜 의사 늘리면 안된다는 건지
의사들 주장 설득력 얻지 못해

이제 ‘과학적 근거’는
의사들이 제시해야 할 상황
이쯤에서 불행한 대결 끝내고
더 나은 의료 위해 머리 맞대길

만약 1000명이었다면 달랐을까. 정부가 의대 증원 규모로 2000명이 아닌 1000명을 제시했다면 전공의는 병원을 지키고, 의대생은 강의에 출석하고, 의협은 백지화 요구를 접었을까. 4년 전 문재인정부에서 400명 증원을 꺼냈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반론도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졸속 증원” 구호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말로 바뀐 것 정도. 몇 명이었든, 27년간 증원을 막아온 이들의 관성적 반대는 마찬가지였지 싶다.

그래도 ‘과학’을 말하니 한번 따져보는 게 좋겠다. 2000명 증원은 정말 비과학적인가. 의대 정원은 2000년 의약 분업 당시 의사들의 요구로 350명이 줄었다. 의약 분업에 파업하다 갑자기 꺼낸 의대 감원 350명은 어떤 과학적 근거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지금까지 배출하지 못한(감원이 없었다면 배출됐을) 의사가 6650명이다. 이는 순전히 감원에 따른 손실일 뿐, 이후 줄곧 동결된 것도 생각해야 한다. 프랑스가 의대 정원을 2000년 3850명에서 지금 1만명으로, 영국이 5700명에서 9500명으로 늘리는 동안, 우리는 줄어든 정원에 한 명도 더하지 못했다. 남들이 두 배로 늘릴 때 그러지 못한 터라, 배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의사는 6650명보다 훨씬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고령화로 급증하는 의료 수요를 감당하는 일이 세계 각국의 과제로 대두했다. 저출생에 인구가 줄더라도 노인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65세 이상의 의료 수요는 그 미만 연령대보다 5배나 높다. 이미 의대 정원을 저렇게 늘려놓은 나라도 앞다퉈 더 늘리고 있다. 프랑스는 2021년부터 해마다 20%씩 증원하는 정책을 실행 중이고, 영국과 독일도 5000명 추가 증원을 확정했다. 우리는 보건사회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 서울대 연구팀의 세 추계에서 모두 2035년까지 1만명 안팎의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향후 5년간 의대생을 2000명씩 더 뽑아 그들이 의료현장에 가세하는 2035년 무렵 부족한 의사 인력을 메우고, 3~5년마다 상황에 맞게 조정하자는 것이 ‘2000명’ 숫자가 나온 배경이다.

2000명도 충분치 않다는 방증은 각종 통계와 현장에서 숱하게 발견된다.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한의사 제외 2.1명)는 OECD 꼴찌인데, OECD 평균(3.7명)에 도달하려면 의사를 8만명 더 늘려야 한다. 2000명씩 5년간 1만명을 더 배출해도 평균에 한참 모자라는 2.3명이 될 뿐이다. 인구가 고령화하면 의사도 고령화한다. 현재 전체 의사 중 65세 이상은 8%인데, 2035년이면 30%로 치솟는다. 특히 40~65세 숙련의 비중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터여서 현장의 의사 부족 실태는 수치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이렇게 의료의 여러 측면을 비추는 통계와 현상을 종합해 정책을 도출한 과정이 과학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과학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과학적 근거’를 외치는 의사단체의 행태가 비과학적인 억지에 가깝다. 의협은 법원에 일본의 의대 증원 자료를 제출하며 “일본은 17년간 서서히 늘렸다”는 주장을 폈다. 한꺼번에 2000명씩 늘리지 않았다는 건데, 일본이 점진적 증원을 한 그 기간에 우리는 단 한 명도 못 늘리게 집단행동으로 가로막은 것이 바로 의사들이었다. 인과관계조차 입맛대로 거르는 게 과연 과학적인가. 의협 회장은 증원에 찬성하는 인천시의료원장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3000명 증원을 요구했다고 알려진 병원단체는 신상 털기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우격다짐이 그토록 주장하는 과학적 논쟁인가.

의대 증원 필요성을 우리는 과학적 근거를 넘어 이미 의료현장에서 경험적 근거로 체감하고 있다. 소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등 의사가 없어 환자를 못 받는 병원이 속출하고, 그래서 여럿이 목숨까지 잃었다. 필수의료 현장에선 이미 의료 붕괴 상황이라 호소하는데, 의사단체는 의사를 늘리면 의료 붕괴가 온다고 주장한다. 마침 근거자료를 검토한 법원이 증원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이제 과학적 근거는 거꾸로 의사들이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왜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건지, 왜 의사를 늘리면 안 된다는 건지. 이 본질적인 두 질문에 지난 석 달간 선언하듯 외쳤을 뿐,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재판부가 납득 못한 주장 외에 다른 게 없다면, 그만 혼란을 수습하면 좋겠다. 더 나은 의료를 위해 정부와 의사가 함께 할 일이 너무 많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