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국가유산청 시대, 안 보이는 비전

[손영옥의 컬처 아이] 국가유산청 시대, 안 보이는 비전

입력 2024-05-23 00:38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이름을 바꿔 지난 17일 출범했다.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이 국가유산기본법으로 대체된 데 따른 것이다. 60년 넘게 이 땅의 유적과 유물을 공식 지칭하던 용어 ‘문화재’는 용도 폐기됐다. 부처 이름이 바뀌어도 수장은 전과 같은 차관급 청장이라서 달라질 게 뭐 있겠나 싶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언어 자체가 이데올로기 아닌가. 이름 변경과 함께 역할이 달라지고, 조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며 위상은 당연히 올라갈 것이다.

2년 전 윤석열정부 출범에 즈음해 문화재청에서 조직 체계 개편을 추진하면서 각계에 자문을 구했다. 자문에 응했던 A교수는 “새로 바뀔 부처 명칭에는 절대 ‘문화’라는 단어가 들어가선 안 된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는 항상 정치·경제의 하위라는 인식이 뿌리 깊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고 털어놨다.

현실이 그렇다. 정부든 언론사든 조직 서열상 문화는 항상 정치·경제보다 밀린다. 그러니 끗발 없는 이미지의 ‘문화’를 떼어내고, 애국심 풀풀 풍기는 강력한 언어적 기호 ‘국가’를 채택한 국가유산청의 장래는 창창해 보인다. 위상 제고를 위해서는 ‘신의 한 수’ 같은 작명이다. 국가유산청을 소속 청으로 둔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잔뜩 긴장한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다.

더욱이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 등 인류 유산 3종 세트를 한 부처에서 총괄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예컨대 호주에서는 자연유산에 관한 정책은 환경부 관할이다. 이처럼 강력한 권한과 산뜻한 이미지로 출범하는 국가유산청이지만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름을 바꾼 이유로 문화재(文化財)는 인류의 유산을 ‘재(財)’, 즉 재화적 가치로 바라보는 담론이라 시대적 한계가 있다는 걸 이유로 내세웠지만, 새 청사진은 오히려 산업과 자본에 더 갇힌 인상을 준다.

국가유산청은 자료를 통해 문화재라는 용어가 ‘과거의 보존’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과거 지향, 지역개발의 걸림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이제 그런 이미지를 불식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내세웠다. 구체적으로 개발행위 허가절차를 일원화해 처리기간을 대폭 단축시킨 ‘국가유산 영향진단’ 제도를 도입하고, 국가유산 주변 500m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던 규제를 지리적 여건 등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재조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세계유산 옆에 고층 아파트를 짓는 제2, 제3의 ‘김포 장릉 아파트’가 생기는 시대를 예고하는 거 아닌가 걱정된다. 산업 육성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국가유산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가칭)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출범 배경과 비전으로 경제적 관점, 산업적 관점이 유독 강조된다.

그런데 문화재를 버리고 국가유산을 쓰기까지 60여년이 걸렸다. 그러니 국가유산청 시대는 최소 60년 근미래의 변화상을 아우르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그 변화상의 핵심은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정책을 편다는 건지 비전은 보이지 않았다.

국가유산청은 출범에 즈음해 ‘K-헤리티지 시스템의 의의·효과 그리고 미래’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발제자로 나선 수전 매킨타이어 탬워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부위원장은 호주의 경험을 살려 다문화 시대를 맞아 이주민에게 자국의 국가유산에 대해 공감하게 하는 교육과 공동체 활동을 강조했다. 로드니 해리슨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는 인류세 시대 기후변화에 대응한 국가유산의 보존과 관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다문화와 기후위기는 한국도 그 자장 안에 성큼 들어간 게 현실이다. 국가유산청의 정책 비전에서 ‘자본주의 냄새’만 맡은 이는 나뿐인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