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김정은이 답방했다고 달라졌을까

[세상만사] 김정은이 답방했다고 달라졌을까

권지혜 정치부 차장

입력 2024-05-24 00:33

최근 발간된 문재인 전 대통령 회고록에는 재임 기간 총 네 번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곳곳에 묻어난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처음 대면한 김정은에 대해 “아주 예의 발랐고 연장자에 대한 존중이 몸에 밴 듯 행동했다”고 적었다. 미국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전격 선언하고 이를 수습하려고 더 전격적으로 열린 5·26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9·19 평양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문 전 대통령은 김정은의 서울 답방 시기를 ‘연내’로 못 박지 않은 게 못내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랬다면 2차 북·미 협상에도 속도가 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다. 문 전 대통령은 “비핵화하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은 진심이었다”고 강조했다.

2019년 2·28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고 그해 6·30 남·북·미 판문점 회동을 끝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동력을 잃었다. 문재인정부는 그 뒤로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이미 대선 국면에 접어든 미국은 흥미를 잃었고 핵 담판에 나섰다 망신만 당했다고 생각한 북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의 상황은 알려진 대로다. 북한은 2020년 6월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고 연락채널을 단절했다. 채널이 끊긴 상태에서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이 이렇게 극단적 조치를 취한 것을 두고도 문 전 대통령은 “나중에 김정은이 그 일이 미안했던지 연락채널을 복원하면서 남북연락사무소를 군사분계선 일대에 다시 건설하는 문제를 협의해보자는 제안을 친서로 해왔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이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물론 김정은이 실제 그렇게 행동하고 말했을 수 있다. 미 대통령은 톱다운 협상을 선호하는 도널드 트럼프였고 그사이에 북·미 협상을 어떻게든 만들어보려는 문 전 대통령이 있었다. 김정은으로서는 제재 해제를 얻어낼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을 법하다. 그러나 회고록이 나온 2024년 5월의 김정은은 그 김정은이 아니다. 남북 관계, 대북 정세는 180도 바뀌었다. 김정은은 지난해 말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또 핵무력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북한은 한반도 남쪽을 겨냥한 무기체계에 전술핵을 탑재할 수 있도록 고도화하는 작업에 속도를 내며 대남 군사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전직 대통령이 굳이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은 진심이었다, 참 예의 바른 지도자였다고 두둔하는 책을 낼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2021년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을 존중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고 이것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는데도 문 전 대통령은 김정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이고 있다.

회고록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김정은이 한국에 오면 한라산을 가보고 싶어해 윗세오름 등 적절한 곳에 임시 헬기 착륙장을 만들 궁리를 했다, KTX를 타보고 싶어해 KTX로 이동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이야기 등이다. “김정은이 연평도를 방문해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고통을 겪은 주민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대목도 있는데 이건 정말 선을 넘은 것 같다. 북한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벌인 포격으로 시작된 교전으로 해병대원 2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던 초등학생들, 조업 중이던 어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대피해야 했다. 그때의 악몽을 겪은 사람들, 그 가족들은 ‘위로’ 운운하는 김정은의 말을 전해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착잡한 일이다.

권지혜 정치부 차장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