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스칼렛 조핸슨의 목소리

[한마당] 스칼렛 조핸슨의 목소리

태원준 논설위원

입력 2024-05-27 00:40

“허락을 얻기보다 용서를 구하라.” 미국 컴퓨터 과학자 그레이스 호퍼가 남긴 이 말은 실리콘밸리에서 행동강령처럼 여겨져 왔다. 혁신의 본질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인데 일일이 허락을 얻어가며 언제 세상을 바꾸겠나, 문제가 생기면 용서를 구할지언정 일단 저지르고 보라는 뜻이 함축돼 있다.

이를 가장 과격하게 실천한 기업은 우버였다. “규제는 혁신을 이길 수 없다”는 구호 아래 어느 도시에서든 영업부터 시작했다. 승인받지 않은 불법 영업 문제가 불거지면 로비나 소송, 여론전을 통해서 사후에 해결하는 식이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호퍼의 말을 변형해 “빠르게 움직여 파괴하라(Move Fast and Break Things)”를 모토로 삼았다. 페이스북은 세상이 SNS 규제의 필요성을 미처 떠올리기 전에 사람들의 소통 방식을 바꿔버렸고, 가짜 뉴스 등 뒤늦게 불거진 부작용에 알고리즘을 수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도 이 접근법을 충실히 따랐다. 책과 뉴스, 영화와 그림 등 저작권이 설정된 온갖 자료를 가져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학습시키면서 한 번도 허락을 받지 않았다. 일단 저질렀고, 이제 속속 제기되는 저작권 소송에 사과하듯 응하는 중이다.

최근엔 영화배우 스칼렛 조핸슨의 목소리가 도마에 올랐다. 오픈AI는 2주 전 사람과 음성으로 소통하는 GPT-4o를 공개했는데, 이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조핸슨과 너무 비슷했다. 남자 주인공이 AI와 사랑에 빠지는 2013년 영화 ‘그녀(Her)’에서 AI의 목소리를 연기한 조핸슨에게 올트먼은 GPT-4o의 목소리가 돼 달라고 두 차례나 요청했다고 한다. 분명히 거절했는데도 GPT-4o가 자기와 ‘기이할 만큼 닮은’ 목소리로 말하는 걸 본 조핸슨이 발끈해서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이다.

올트먼은 부랴부랴 그 목소리를 삭제하고 “다른 성우의 음성”이라 해명했지만, 의도적으로 비슷한 목소리를 찾았던 것이리라 의심하는 비판 여론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허락보다 용서’의 실리콘밸리 방식을 이제 다들 알기 때문일 테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