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한 배 탄 민주·팬덤

[돋을새김] 한 배 탄 민주·팬덤

지호일 정치부장

입력 2024-05-28 00:38 수정 2024-05-28 00:38

우리 어머니도 좋아하시는 인기 트로트 가수 김호중이 ‘대형 사고’를 쳤다. 지난 9일 술에 취해 차를 몰다 중앙선을 넘어 택시를 들이받았을 때 바로 자수하고 사과했다면 지금 같은 회복 불능 지경으로 추락하진 않았을 터다. 그러나 김호중은 자멸의 길로 걸어 들어갔다. 소속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아티스트를 지킬 것을 약속드린다”는 입장을 팬카페에 올렸다. 일편단심 팬덤의 방패 뒤에서 반전과 살길을 찾으려 한 것이다.

소속사가 어떻게 김호중을 지키겠다는 건지는 이후의 대처에서 드러났다. 운전자 바꿔치기와 허위 자수 강요,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카드 제거 등 조직적인 범행 은폐. 그러나 그럴수록 죄만 덧붙여졌고 “조사가 끝나면 이곳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팬들에게 공언했던 김호중은 구치소행 호송차에 올랐다. 팬덤은 김호중을 지키지 못했다. 오히려 팬덤의 맹목적 환호성이 김호중을 현실 인식의 결여 상태로 만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의 팬덤이 주로 사적 영역에 머무른다면 정치인 대상 팬덤은 종종 공적 영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강성 지지자들이 정당의 정책 방향이나 후보 공천에 목소리를 내고, 반대로 정치인들이 팬덤에 기대려 하는 ‘정치의 팬덤화’는 이미 사회적 현상이 됐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초연결사회가 이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동시에 확산시키고 있다. 팬덤의 위력은 지난 총선을 거치면서도 다시 확인됐다.

팬덤은 팬과 대상 간 강력한 ‘정서적 유착’을 바탕으로 한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강하게 작용한다. 숭배 대상에 대한 비판은 감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과잉 공감은 외부의 비판 세력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 종종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연예인을 상대로 한 팬덤이라면 그렇거니 하고 넘길 수 있지만 팬덤의 대상이 정치일 때는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더불어민주당 상황을 둘러싸고 팬덤정치 이슈가 다시 부각됐다. 당내 국회의장 경선에서 추미애 당선인이 패배한 이후 강성 지지자들이 의원들을 ‘응징’하겠다고 나선 장면이 단적인 예다. 임기 종료를 앞둔 김진표 국회의장이 “21대 국회를 돌아보면 진영정치, 팬덤정치의 폐해가 더욱 커졌다”고 한탄할 정도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팬덤을 향해 더욱 노를 젓는 모습이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열린 당선자 워크숍에서 당원권 강화를 결의하더니, 이를 실행하기 위한 당헌·당규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더해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 후보 역시 선출되지 않은 당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제시됐다. 그리고 이에 ‘당원 민주주의 강화’라는 명분을 붙였다.

정당 운영에 당원 목소리를 얼마나 반영할지는 각 정당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이고, 시대 흐름상 당원 참여 확대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위험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강성 팬덤은 다른 입장과 견해를 가진 구성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따르지 않으면 우리 당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식의 문자 폭탄은 당내의 공적 비판과 토론을 막는다.

강성 지지층이 강성 의원을 ‘양육’하고, 그 의원의 강성 발언에 지지층이 더 강성해지는 기형적 팬덤정치의 고착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다원적 견해와 가치를 대변해야 할 공당의 역할은 무시되고, 국민의 대표자인 의원마저 팬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심부름꾼 역할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 당원 민주주의 강화가 당내 민주주의, 나아가 대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그런 불길한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호일 정치부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