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시간은 힘이 세다

[청사초롱] 시간은 힘이 세다

고경남 (서울아산병원·소아청소년과)

입력 2024-05-29 00:32

외래진료 내려가기 전에 거울을 보니 흰 머리카락이 몇 개 눈에 띈다. 어젯밤 세수할 때는 안 보였던 것 같은데. 하룻밤 사이에 자랐을 리도 없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또박또박, 야속하게 흘러가는구나. 씁쓸한 마음으로 외래진료를 시작했다.

외래 대기 명단에 낯선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28세 남자, 강지환’. 진료실 문이 열리자 건장한 청년이 밝은 목소리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환자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다. “강지환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제 외래는 오랜만에 예약하셨네요.” 그가 쑥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선생님 뵙고 싶어서 예약했어요.”

나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면서 과거 진료 기록을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2023년, 2022년, 2021년…. 1년에 한 번씩 병원에 찾아왔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촘촘하게 병원을 방문했던 기록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스크롤 끝에서 2009년의 초진 기록에 눈이 멈췄다. 순간, 환자에 대한 기억이 온전히 되살아났다.

그는 중학교 때 갑자기 다리가 완전히 마비돼서 우리 병원 응급실로 급히 이송됐다. 검사 결과 급성 백혈병으로 진단받았고 백혈병이 척수까지 침범해서 하지 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방광 기능도 마비가 돼서 방광에 인공적으로 구멍을 내서 소변을 배출해야만 했다. 사춘기 소년에게는 너무 가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울증도 심했다.

환자의 치료를 잠시 도왔었다. 다행히 백혈병은 치료에 반응이 좋았지만 마비 증상은 아주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환자의 마지막 모습은 여전히 혼자 걷지 못하고 소변 역시 방광루를 통해서 해결하는 상태였다. 외래에서 간혹 만날 때마다 더딘 재활 속도 때문에 표정에는 항상 좌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을 나갔던 소년이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처럼 건장한 청년이 되어 걸어들어온 것이다.

“소변은 좀 어떠세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문제없어요. 다리도 많이 좋아져서 등산도 다닐 수 있어요.” 재활치료를 받아도 좋아지는 게 없다면서 자주 화를 내던 모습이 이렇게 밝게 변할 줄이야. “그때 선생님이 말씀하셨었잖아요. 매일 열심히 운동하면, 하루 뒤에는 변화가 없는 거 같아도 1년 지나면 더 나아지고 5년 뒤에는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재활치료 하기 싫을 때마다 선생님 말씀 떠올리면서 열심히 했더니, 정말 걷게 됐어요.”

시간은 치유의 힘이 있구나. 마비된 신경이 되살아나고, 위축된 근육이 불어나고 우울과 분노의 상처도 메워지는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병든 몸은 재활과 회복의 여정을 거쳐 다시 강인해지고 상처받았던 마음도 치유되며 성숙해진다. 나도 어느덧 시간이 몸을 서서히 부식시키는 것이 느껴지는 나이다. 관절이 뻑뻑해지고, 머리카락은 옅어지고, 수정체는 탄력을 잃어가지만, 어쩌면 젊은 시절의 조급함과 불안이 치유되고 성숙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전에 봐주시던 교수님이 퇴임하시면서 이제 병원에 그만 와도 된다고 했는데, 선생님 꼭 한번 뵙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은행에 다니고 있고 몇 달 뒤에는 결혼할 계획이라며 쑥스럽게 웃는다. 나는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말했다. “혈액검사 결과는 다 좋네요. 앞으로도 건강관리 잘하면서 지내면 되겠네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 보여줘서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항상 건강하세요.” 그가 힘찬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갔다. 내가 그에게 주었던 용기를 나에게 되돌려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