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안전 이별’이 이토록 어려운 비정상 사회

[한승주 칼럼] ‘안전 이별’이 이토록 어려운 비정상 사회

입력 2024-05-29 00:50

'교제 살인' 사흘에 한 명꼴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사안

가정폭력·스토킹과 달리
강제 분리 등 피해자 보호 안 돼

국회는 관련 법 통과시키고
반의사불벌 조항 없애야

“빚이 수천만원 있다며 돈 좀 빌려달라고 하세요.” “정떨어지게 진상처럼 행동하세요.” ‘안전 이별’을 검색하면 나오는 조언들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안전 이별을 꿈꾼다. 가장 친밀한 관계였지만 이별을 통보하는 순간, 때로는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상대는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한다. 술 마시고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른다. 본인이 죽겠다고, 또는 당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런 ‘교제 폭력’은 폭력에 그치지 않고 종종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피해자는 대부분 물리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교제 폭력이 연인 사이의 개인적인 일로 여겨진다. 교제 살인에 대한 정부의 공식 통계조차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한 통계를 보니 지난해만 최소 138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됐다. 사흘에 한 명꼴이다.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는 사회적 인식이 바뀔 때가 됐다.

얼마 전 대낮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20대 남성이 이별을 통보한 여성을 흉기로 살해했다. 지난 3월에는 한 남성이 헤어진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그 모친까지 중상을 입혔다. 충격적인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교제 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는 2020년 8951명에서 지난해 1만3939명으로 3년 새 55.7%나 늘었다. 하지만 구속되는 비율은 고작 2% 정도다. 왜 그럴까. 관련 법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교제 폭력은 ‘썸’을 포함해 연인 사이 발생하는 언어·정서·성적·신체적 폭력을 말한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표현은 공권력이 개입해 처벌해야 할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할 우려가 있어 교제 폭력으로 부른다. 관련 법이 없기 때문에 형법상 일반 폭행죄나 협박죄로 다뤄져 경미한 처벌을 받는다. 폭행은 ‘반의사불벌죄’다. 피해자의 처벌 의사가 없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교제 폭력의 맹점이 있다. 일반 폭력과 달리 교제 폭력은 가해자가 잘 아는 사람이다. 일반 폭력에 비해 신고하기 어렵고, 신고해도 가해자가 고소를 취하해 달라며 협박한다. 그래도 취하를 안 하면 보복하고 또 폭행하기도 한다. 재범 또는 강력 범죄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가정폭력·아동폭력·스토킹의 경우 신고가 들어가면 경찰이 일단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조치하고, 피해자 보호를 우선으로 둔다. 그런데 비슷한 맥락에 있는 교제 폭력은 그게 안 된다. 강제분리 등 조기에 피해자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단순히 연인 사이에 때렸다 해서 가해자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릴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필요한 것은 교제 폭력을 가정폭력과 같은 테두리로 묶어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 반의사불벌 조항을 아예 빼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서 가해자를 즉시 체포하는 의무체포제가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피해자에게 고소를 원하느냐, 처벌을 원하느냐 물어보거나 화해나 중재를 시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외국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미국은 1994년 여성폭력방지법을 제정해 피해자 범위를 교제 폭력까지 확대했다. 의무체포제도 시행하고 있다. 영국은 2012년 가정폭력의 정의를 가족 구성원은 물론 친밀한 파트너 관계로까지 넓혔다. 교제하고 있는 상대방의 폭력 전과를 조회할 수도 있다. 일본도 2013년 배우자폭력법의 적용 대상을 생활 본거지를 같이하는 교제 관계로 확대했다. 네덜란드는 교제 폭력을 가중처벌한다.

반면 우리는 연인 간 폭력을 따로 구분해 교제 폭력으로 부르기 시작한 지 10년밖에 안 됐다. 2015년 연인의 외도를 의심한 남성이 여성을 살해해 유기한 사건이 기점이 됐다. 이후 거의 10년 동안 국회에서 교제 폭력 관련 법안이 8건이나 발의됐으나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는 일이 되풀이됐다. 21대 국회에서도 가해자 접근을 차단하는 피해자 보호 방안이 포함된 두 건의 법률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임기 종료로 이 역시 폐기되고 말았다. 교제 폭력 관련 법을 정비하거나 새로 제정하는 일이 10년 가까이 허송세월할 일인가.

이제라도 교제 폭력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사흘에 한 명꼴로 사람이 죽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22대 국회는 교제 폭력 법안을 우선적으로 통과시켜야 한다. 보복이 두려워 헤어지지 못하고, 안전 이별법을 찾아야 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