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SK, not OK

[뉴스룸에서] SK, not OK

김혜원 산업1부 차장

입력 2024-06-10 00:38

SK그룹 성장사에서 소버린 사태는 여러 의미를 지닌다. 당시 소버린 대응팀에 참여한 재계 고위 인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만큼 초기 전략이 부재했다”고 털어놨다. 직원들이 위임장을 받으러 뛰어다니는 동안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방계 오너도 지분을 팔고 나갔을 정도였다. 최 회장은 내부 인력으론 위기를 넘기 어렵다고 보고 왕윤종·김준호·이승훈 등을 영입해 기업 지배구조와 사업·재무구조 전면 개편에 착수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SK그룹이 소버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건 여론의 힘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버린은 투기 자본으로 악의 축, 최 회장은 이에 맞서는 고독한 전사’ 프레임이 만들어지자 꼬인 스텝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사업 측면에서는 SK그룹이 한국에 기름을 공급하고 통신망을 제공하는 국가 기간산업을 영위한다는 점을 대중에게 열심히 알렸다. 그리고선 이사회 중심의 투명한 의사결정 체계 구축과 5년 뒤 지주회사 전환 등 새로운 지배구조 ‘카드’로 정부와의 물밑 협상이 순항한 결과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소버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 SK그룹이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최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은 재계의 핫이슈가 됐다. 항소심 판결 속보가 쏟아지는 순간 아연실색했다. 둘의 이혼 소송은 개인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일로 비화했다. SK그룹 경영진이 매달려 경영권을 사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을 확정하면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해야 하는 1조3808억원의 재원 마련 과정에서 SK그룹 지배구조나 재무구조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내부에서는 소버린 사태보다 더한 위기라고도 한다.

부부 사이 속사정이야 모를 일이지만 소버린 사태 때와 다른 점은 최 회장을 둘러싼 여론이 비우호적이라는 점이다. 거스르기 힘든 여론을 최 회장이 뒤집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의 이혼은 젠더 갈등 한가운데 있기도 하다. SK그룹이 현재 택하고 있는 여론 반전 작전은 SK그룹의 적통성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이 부친 타계 후 38살의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아 얼마큼 성장시킨 주역인지 이미지를 부각하는 식이다. 이는 항소심 재판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보호막으로 오늘날의 SK그룹이 존재하기 때문에 노 관장의 기여가 있었다며 손을 들어준 것을 에둘러 반박하는 논조이기도 하다. 최 회장 측은 SK그룹이 범죄 수익으로 큰 회사가 아니라는 점, 노 관장이 사모펀드 등과 손잡고 경영권을 찬탈해 그룹을 와해하려 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돌리려고 할 것이다.

SK그룹의 작금의 위기가 소버린 사태와 비슷한 점은 지배구조가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최 회장이 노 관장과 합의 없이 1조4000억원 가까운 현금을 고스란히 줘야 한다면 택할 카드는 그리 많지 않다. SK㈜ 주가를 최대한 끌어올려 주식 담보 대출을 목전 한도까지 받는 것이 그나마 쉬운 방법이지만 이자 부담은 눈덩이로 늘어난다. 경영권과 연관성이 낮은 계열사를 처분하거나 비주력 자산을 매각하는 방법도 있다. SK실트론이 대상으로 유력하지만 반도체 공급망관리(SCM)에서 필요한 계열사라는 점은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계열사 배당 여력을 확대해 지주사와 최 회장 주머니로 현금이 들어오게 할 수도 있다. 최 회장의 개인사로 SK그룹이 공중분해 될지, 최 회장이 재계 2위로 키운 SK그룹을 지켜낼지, 재계 역사의 한 페이지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

김혜원 산업1부 차장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