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가루 뿌린다고? 불황엔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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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사로잡은 ‘매운맛 연대기’

입력 2024-06-13 06:03
게티이미지뱅크

불닭, 매드핫, 마라, 청양고추, 레드스파이시…. 매운맛을 연상시키는 수식어를 단 라면, 치킨, 과자, 요리 등이 넘쳐나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인의 입맛은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해왔다. 단적으로 1986년 출시된 농심 신라면의 스코빌지수(맵기를 측정하는 척도)는 1300SHU였다. 다른 라면보다 맵다는 의미에서 매울 신(辛)자가 붙었다. 수차례 리뉴얼을 거쳐 현재 신라면은 3400 SHU이다. 이젠 신라면 정도는 ‘순한맛’으로 치부된다. 식품업계는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매운맛 식품 공급을 늘리고 있다. 매운맛 열풍은 왜 불기 시작한 걸까.

매운맛의 경제학

“경기가 안 좋으면 매운맛 식품이 잘 팔린다.” 이 말은 유통업계에 떠도는 오래된 속설 중 하나다.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극적인 먹거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실제 외환위기가 터진 이듬해인 1998년 생활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11.1% 상승했다. 생활물가지수 집계 이후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대개 사람들은 생활물가지수 상승률이 높을수록 살기 어렵다고 느낀다.

이맘때 전국을 강타한 음식이 매운 짬뽕과 떡볶이다. 최악의 경제위기 속 실직자와 퇴직자들이 쏟아져나오며 저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한 요식업이 주목받았다. 본사에 로열티를 지불하는 프랜차이즈 식당보다 자영업이 인기였다. 여기에 강렬한 맛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매운맛’ 간식이나 요리를 파는 음식점 붐이 일었다.

외환위기 여파가 이어진 2000년대 초중반에도 생활물가지수는 각각 전년 대비 3~5% 가파른 상승세였다. 매운 음식은 이때도 어김없이 대유행했다. ‘홍초불닭’ 등 불닭을 판매하는 점포가 눈에 띄게 늘었고 길거리 간식으로 ‘폭탄맛 닭꼬치’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동대문엽기떡볶이’ 등 맵고 자극적인 맛을 앞세운 떡볶이 프랜차이즈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제 불황과 궤를 같이하던 매운맛 유행은 2010년대 초반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삼양식품에서 출시한 불닭볶음면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다. 출시 이후 불닭볶음면 18종 시리즈는 지난해 말까지 누적 판매량 57억개를 돌파했다. 매운맛의 인기는 한국적인 매운맛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짝인기’에 그칠 것이라고 여겨졌던 중국식 마라탕은 이미 인기 메뉴로 일상에 녹아들었다. 마라 맛을 변주한 다양한 식품에 익숙해진 것이다.


붉게 물든 먹거리

유통업계가 붉게 물든 현실은 ‘국민 음식’의 출시 경향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라면은 점점 매워지는 추세다. 농심은 지난해 8월 매운맛을 2배 이상 강화한 ‘신라면 더레드’를 한정판으로 출시했다. 스코빌지수가 무려 7500SHU 였다. 보름 만에 500만봉이 완판되는 등 큰 인기를 끌면서 농심은 같은 해 11월 해당 제품을 정식 출시했다. 오뚜기는 지난해 열라면에 마늘과 후추를 추가한 ‘마열라면’을 내놨다. 출시 두 달 만에 600만개 이상이 판매됐다.

치킨업계도 매운맛에 빠져든 지 오래다. 굽네는 2016년 매운맛 ‘굽네 볼케이노 치킨’만으로 1200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BBQ의 ‘마라핫치킨’도 같은 해 출시 직후 자체 판매량 5위에 자리했다. BHC의 인기 제품 ‘맵스터’도 같은 해 출시 한 달 만에 28만개가 팔렸다.

짭짤하거나 단맛 위주였던 과자도 매운맛 옷을 입기 시작했다. 롯데웰푸드는 지난달 신제품 ‘꼬깔콘 매드핫’(MAD HOT)을 출시했다. 스코빌지수는 청양고추 맛에 준하는 9300SHU에 달한다. 오리온이 지난해 하반기 선보인 ‘꼬북칩 매콤한맛’과 ‘포카칩 MAX 레드스파이시맛’은 출시 3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400만봉을 넘어섰다.

마라탕이 젊은층에 인기를 끌자 매운맛 트렌드는 ‘마라맛’으로 옮겨갔다. 오뚜기는 오는 14일부터 마라 라면 브랜드 ‘마슐랭’을 선보일 예정이다. 농심과 팔도도 지난 3월부터 각각 ‘사천마라탕면’과 ‘팔도마라왕비빔면’을 판매하며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매운맛 열풍은 한국을 넘어 전세계로 뻗어 나가는 중이다. 삼양식품은 최근 약 30년 만에 전통의 라면 업계 강자 농심을 제치고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SNS)에서 불닭볶음면 ‘먹방’이 챌린지처럼 자리잡으면서 해외에 불티나게 팔렸기 때문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매운맛 제품이 우리나라 식품 수출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며 “‘K콘텐츠’와 맞물리면서 매운맛 제품은 수출을 견인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말했다.

왜 매운맛에 열광할까

전문가들은 매운맛 열풍의 대표적인 이유로 스트레스 해소를 꼽는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은 교감신경을 활성화하면서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해 일시적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들이 많이 나와 있다. 업계 관계자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매운맛 제품이 잘 팔린다는 말은 매출로 어느 정도 증명되고 있다”며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는 매운맛을 찾는 심리가 강해지기 때문에 유통업계도 이에 맞춰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입맛이 갈수록 더 매운맛을 추구한다면 한국 사회의 스트레스 지수가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고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도 유행을 부추긴 요인 중 하나다.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세대 사이에서 ‘맵부심’(매운맛+자부심)을 부리는 것은 하나의 놀이 문화로 정착했고, 남들에게 뒤처지기 싫어하는 동조 심리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당장 인스타그램에 매운맛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33만건이 넘어간다.

황진주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맵부심은 하나의 유행이자 트렌드다. 특히 또래 집단에 대한 동조 성향이 강한 청소년 소비자들은 이런 문화를 통해 소속감을 느낀다”고 분석했다.

매운맛 음식이 긴 시간 동안 국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식문화로 자리잡았다는 진단도 있다. 주요 식품군이나 요리마다 매운맛이 하나의 범주가 됐다는 것이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꾸준히 시장을 모니터링 해본 결과 ‘맵부심’은 이미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 가능하다”며 “매운맛 인기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박성영 기자 ps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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