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정주영의 소 떼 방북이 떠올랐다

[내일을 열며] 정주영의 소 떼 방북이 떠올랐다

강주화 산업2부장

입력 2024-06-20 00:32

한반도 정세에 격랑이 일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한 북한은 얼마 전까지 남한에 오물 풍선 수천 개를 날렸다. 오물은 폐지, 담배꽁초, 가축 분뇨 등이었다.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을 보고 있자니 서글펐다. 분단 70여 년의 한민족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건가 하는 생각에서다. 오물 풍선을 보니 불현듯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초대 회장이 소 떼를 끌고 판문점을 통과하던 모습이다.

정 회장은 현재는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빈농의 장남이었다. 가난한 농부로 살기 싫었던 그는 아버지 몰래 소 판 돈 7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다. 기업가로 성공한 뒤 그 돈을 갚기 위해 준비했다. 고향에 소 떼를 선물로 가져가는 계획이었다. 정 회장은 1992년 현대서산농장에 소 150마리를 사주면서 방목을 지시했다. 6년 만에 소는 수천 마리로 불어났다. 김대중정부가 ‘햇볕정책’을 제시하며 북한과의 평화협력을 추진하자 정 회장이 전면에 나섰다.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해 북한에 가는 걸 제안한 것이다. 북측은 군사 보안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 사업은 소 판 돈 70원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 원금을 1000배로 갚는 의미에서 소 1000마리를 선물로 가져가겠다. 그런데 소는 비행기나 배로 운반할 수 없다.” 끈질긴 설득이 이어졌다. 마침내 북측이 허가했다. 한 실향민의 꿈이 휴전선을 연 것이다.

정 회장은 1998년 두 차례 방북해 소 1001마리를 북한에 선물했고 북한으로부터 금강산 관광개발사업이란 선물을 받아왔다. 남북 정상은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났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했다. 같은 해 8월엔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소 떼 방북은 결과적으로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의 마중물이 됐다. 남북 관계는 늘 대내외 돌발 사건과 복잡한 역학구도 속에서 예측하기 어렵게 전개됐다. 현재는 금강산도, 개성공단도 닫혔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팃포탯(맞대응)이다. 소 떼 선물이 가고 금강산이 선물로 왔다. 오물 풍선이 오기 전 대북전단 수십만 장을 매단 풍선이 북으로 갔다. 탈북민 단체가 보낸 것이다. 북측은 이런 전단을 체제를 위협하고 최고 지도자를 모욕하는 심각한 상황으로 간주한다. 북한이 오물을 계속 보내자 우리 정부는 9·19 남북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선언했다.

문제는 이 상황이 돌발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북한군은 2014년 10월 대북전단을 향해 고사총을 발사했고 접경지 주민들은 대피했다. 우리 군 역시 대응 사격을 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지금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와 군의 통신선 채널이 2023년 4월 이후 모두 단절된 상태다. 돌발 상황이 국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부가 민간단체의 전단 살포를 제재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9월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한 법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위헌 결정했다. 그렇다고 평화와 안전을 위해 전단 살포를 단속하는 것까지 위헌으로 본 건 아니다. 분단국가에서 평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정부가 위기를 관리해야 한다.

한국갤럽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인은 정 회장이었다. 산업화의 초석이 된 현대를 일궜을 뿐만 아니라 소 떼 방북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한 것도 그가 존경받는 이유일 것이다. 현재 시점에선 요원해 보이지만 북한을 방문해 남북 경협 물꼬를 틀 제2의 정주영 회장이 나오길 바란다.

강주화 산업2부장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