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원로에 대한 예우란 무엇인가

[손영옥의 컬처 아이] 원로에 대한 예우란 무엇인가

입력 2024-06-20 00:37

얼마 전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된 왕선정 작가의 회화를 보고 웃음이 났다. 그림 속에 묘사된 화실에 ‘MMCA’가 인생 목표처럼 적혀 있어서다. MMCA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영문 이니셜이다. 그곳에서 전시하는 건 이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 모든 미술인의 꿈이다.

그 ‘꿈의 전당’에서 개인전을 마친 작가가 이달 초 미술관을 명예훼손과 저작권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 사태를 ‘개인 대 기관’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개인이 원로 작가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한국에서 ‘원로’는 감히 건드리기 힘든 무게감이 있다. 더욱이 그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1960∼70년대 실험미술의 간판 김구림(88) 작가가 아닌가.

사태를 지켜보며 미술관 측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 잘못한 게 아니라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다.

전시 도록에는 전시장에 나온 작품만 싣는 것이 관행(원칙)이다. 하지만 이 개인전 도록은 미출품작까지 실었다. 출품작 150여 점 외에 작가의 요구를 수용해 미출품작과 아카이브 자료 등 240여점이 실렸다. 미출품작은 출품작을 보충설명하기 위해 통상 10점 내외로 실린다. 이번 도록의 경우 배보다 배꼽이 크다. 원로의 무게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도록이 560쪽에 달한다. 1세대 섬유예술가 이신자 개인전 도록이 290쪽, 박수근 ‘봄을 기다리다’전 도록이 340쪽이다. 통상의 배 가까운 벽돌책임에도 특수 종이를 써 가볍다. 경량감과 광택이 나는 흰색 양장본 표지, 친환경 재생지 느낌 내지 등이 아방가르드 작가의 예술혼과 어울리는 디자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작가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예우가 화근이 됐다. 미술관은 출품작·미출품작을 구분하기 위해 미출품작에 대해서는 흰색 종이가 아닌 색지(올리브그린색)를 썼다. 그러다보니 “배경색이 미출품작 사진 이미지를 흐리게 해 동일성유지권을 위반했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도록 갈등은 양측이 2쇄를 찍기로 합의함으로써 봉합되는 듯했다. 하지만 2쇄 수정 사항을 놓고 입장 차가 커 고소 사태로 비화됐다.

미술관 측은 인쇄 종이 교체는 가능하지만 작가 측이 요구한 편집자 교체, 편집 순서 교체, 미출품작 대량 재추가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전에 없이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미술관 방침을 넘어선 전례 없는 특혜’라는 표현도 썼다.

그런데 미술관은 왜 처음부터 선(방침)을 지키지 못하고 비틀댔을까. 그랬더라면 이런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원로에 대한 예우’ 이상의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예우의 사전적 뜻은 ‘예의를 지켜 정중하게 대우함’이다. 그 정중한 대우가 ‘의전’을 넘어 원칙을 깨는 선례를 남기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원로에 대한 예우 문제로 다시 선을 넘는 듯하다. 대한민국예술원 70주년 전시를 오는 9월 중순 덕수궁 미술관을 부분적으로 빌려 개최하는 것이다. 최종태 유희영 등 생존 작가 13명과 초대 회장 고희동부터 지난해 타계한 오승우를 비롯한 작고 작가 53명 등 총 66명 전현 예술원 회원이 참여한다. 생존 작가 2점, 작고 작가 1점씩 출품해 한 달간 ‘반짝 전시’를 한다.

미술관 관계자는 “그런 전시는 순서대로 나열하는 전시다. 큐레이팅이 들어가기 힘든 전시다. 80년대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사실상 대관이지만 대관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 탓에 예술원과 공동 주최 형식을 취했다. 예우와 방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답답하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