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배째라’가 통하는 나라

[국민논단] ‘배째라’가 통하는 나라

김주영 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

입력 2024-06-24 00:32

수리비 몇 백만원 받으려고
소송하자니 배보다 배꼽 더 커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우리의 소송비용 부담 제도 탓

변호사 보수부담 제도 개선해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해야

얼마 전 주차장 사고 피해를 당한 어느 지인의 하소연을 들었다. 주차공간이 부족해 이중주차가 일상화된 아파트에 사는 지인은 주차 후 차 키를 맡기라는 경비원의 요구에 키를 맡겼는데 경비원이 만취 상태에서 차를 이동하면서 여러 대의 다른 차량을 추돌했고, 지인의 차량은 운행이 어려울 정도로 크게 파손됐다. 지인의 차가 추돌한 다른 차량들은 보험사로부터 자차보험 처리를 받을 수 있지만 지인의 차는 경비원이 운전했기에 보험처리가 되지 않아 가해자인 경비원과 그 사용자인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로부터 수리비를 변상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변상해 줄 듯한 태도를 보이던 입주자대표회의가 지인에게도 피해분담을 요구했고 실랑이 끝에 변상을 거부하면서 소송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견적 받은 수리비는 몇백만 원 정도였는데 이를 받으려 소송을 하자니 변호사 비용 등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것 같아 고민이 되고, 그렇다고 직접 소송을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딱한 사정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명백히 책임을 져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배째라’고 나오는 경우가 유독 많다. 특히 형사책임이 따르지 않는 대물 교통사고의 가해자, 전세기간이 만료됐음에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집주인, 돈이 없다며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서 외제차 타고 다니는 차용인, 약관에 따라 환불 청구했는데 나 몰라라 하는 인터넷쇼핑사업자, 일을 시킨 다음에 갖은 구실을 대면서 용역비를 지급하지 않는 업주 등 ‘배째라’고 나오는 사람들로 인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례가 넘쳐난다.

이런 경우 ‘내용증명을 보내라’ ‘관공서에 민원을 제기해라’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해라’ ‘무리해서라도 형사고소를 해라’는 등의 해법이 제시되지만 이는 법적 집행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으로는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이길 수는 있다. 피고가 이런저런 꼼수로 소송을 지연시키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이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송비용이다. 수백만 원 받자고 하는 소송은 승소하더라도 상대방으로부터 배상받을 수 있는 소송비용이 몇십만 원 정도이므로 이겨도 상처뿐인 승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 현행법에 따르면 소가가 2000만원 이하인 경우 소가의 10%가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변호사 보수의 한도다. 예컨대 500만원을 청구해 승소하면 실제 지출한 변호사 비용 중 50만원까지만 받을 수 있어 실제 들어간 변호사 보수와 괴리가 크다. 사정이 이러니 피해금액이 적은 경우 가해자가 당당하게 ‘배째라’를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소송비용 부담 제도는 외견상으로는 소송비용 패소자 부담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소송의 복잡성, 소요기간, 당사자가 실제 지출한 변호사 비용과 비용 증가에 기여한 당사자의 책임 정도를 따지지 않고 소가와 패소 비율에 따라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금액만 부담하도록 하므로 ‘배째라’고 나오는 뻔뻔한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해 이기더라도 결국 피해자는 쥐꼬리만 한 소송비용만 보전받게 된다.

반면 변호사 보수 각자 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미국에서는 실정법의 예외규정을 통해 불법행위의 피해를 입은 시민들이 권리구제를 위해 실제 지출한 변호사 비용 전부를 가해자에게 부담토록 한다. 피해액이 소액일 경우에도 불법행위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경우, 소비자 소송처럼 소송 당사자 간에 경제적 불균형이 심한 경우, 불법 채권추심 피해자 등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당위성이 인정되는 경우, 지적재산권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이 소액의 피해도 구제할 필요성이 있는 경우, 보험사의 악의적인 보험금 지급 거부, 잘못된 행정처분으로 피해를 입은 국민이 낸 소송 등의 경우에는 실제 들어간 변호사 비용 전액을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제도는 억울한 피해를 입은 서민들도 부담 없이 변호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변호사로 하여금 민간보안관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소송 비용에 산입되는 변호사 보수로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재판절차를 통해 권리실현을 원하는 국민의 재판청구권과 결부돼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배째라’는 뻔뻔한 가해자가 양산되지 않고 소송 없이 자발적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변호사 보수 부담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김주영 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