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155㎜ 포탄

[한마당] 155㎜ 포탄

태원준 논설위원

입력 2024-06-24 00:40

1차 대전이 참호전의 수렁에 빠진 건 독일의 오판에서 비롯됐다. 프랑스를 6주 만에 점령한다는 속전속결 계획이 마른강 전투에서 패하며 무산되자 독일은 국경지대에 세 겹, 네 겹 참호를 파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참호에 웅크린 적을 공격할 무기가 마땅찮아 육탄 살육전이 반복될 때 프랑스 방산업체 슈나이더의 M1917 곡사포가 등장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참호에 떨어지는 포탄은 1차 대전의 게임체인저가 됐는데, 그 지름이 155㎜였다.

이보다 작으면 파괴력이, 크면 기동성이 떨어져 155㎜는 각국 포병의 주력 무기로 자리 잡았다. 2차 대전 때 미국은 155㎜를 육군의 표준 야포로 설정했고, 이후 나토도 포탄 규격을 155㎜로 표준화했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북한 해안포기지에 대응 사격한 우리 군의 K9 자주포 역시 155㎜ 포탄을 쓴다.

소련 무기체계를 택한 나라에선 152㎜를 서방의 155㎜에 대응하는 포로 삼고 있다. 푸틴이 북한에서 얻어간 것도 2S19 자주포에 쓸 152㎜ 포탄이 주였다고 한다. 북한이 작년부터 러시아에 보낸 컨테이너 6700개에 전부 152㎜ 포탄이 들었다면 300만발이 넘는다. 소련 연방에 속했던 우크라이나도 152㎜ 포를 운용했지만, 러시아의 침공 이후 서방 지원을 받아 155㎜로 전환했다. 전선이 1000㎞나 되는 양국 전쟁은 드론 외엔 별다른 첨단무기가 없어 일찌감치 포병전이 됐다. 우크라이나는 155㎜ 포탄을 하루 7000~8000발씩 쏠 수 있었을 때 대반격에 성공했고, 서방 지원이 줄어 2000발로 떨어지자 북한에서 포탄을 가져온 러시아에 크게 고전했다.

냉전 이후 각국이 포탄 생산을 줄인 터라, 대치 상태로 생산 능력을 유지해온 남북이 이 전쟁의 엄청난 수요를 채워줄 공급처로 떠올랐다.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자제해온 우리에게 푸틴이 북한과 군사동맹을 맺으며 뒤통수를 쳤다. 정부가 무기 지원 가능성을 꺼내자마자 직접 민감하게 반응한 걸 보면 이를 매우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155㎜ 포탄’ 카드를 잘 써먹어볼 때가 됐지 싶다. 우리 생각보다 더 유용할 수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