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기게스의 반지

[살며 사랑하며] 기게스의 반지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입력 2024-06-26 00:35

1990년대 인터넷이 상용화된 후 사람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기게스의 반지를 낀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 기게스의 반지는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된 고대 전설이다. 반지는 소유자의 마음대로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보이지 않는 힘은 감시받지 않는 절대권력 혹은 인간 내면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한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만약 자신의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며 기게스의 반지를 예로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익명성은 플라톤이 언급한 감시받지 않는 힘과 밀접해 있다. 익명성은 두 가지 양상으로 표출되는데, 익명 기부나 응원 댓글처럼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순수한 선의가 드러난 익명성이 있다. 이런 행동은 외부의 인정이나 보상에 좌우되지 않는다.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기게스의 반지가 가진 힘은 무용하다. 반면 악플, 사이버범죄, 허위정보 유포 등 타인에게 정신적 고통과 물리적 피해를 주는 악의적인 익명성도 있다. 이런 행동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어리석은 마음이 녹아 있다. 도덕적 기준 없이 보이지 않는 힘을 악용하는 이들에게 기게스의 반지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해악과 같다.

어린 시절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투명인간은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으로 가득했다. 반지의 전설이 당연한 일상이 된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타인의 시선에 상관없이 행동에 변함이 없는가. 내면의 도덕을 따르며 살고 있는가. 나의 선의는 순수한가. 가상의 공간 속 기게스의 반지를 낀 익명의 사람들을 마주하며 보이지 않는 힘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