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던 尹, 재벌 개혁은?

[이동훈 칼럼]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던 尹, 재벌 개혁은?

입력 2024-07-03 00:50

지청장 시절 ‘충성’ 발언 덕에
대권까지 거머쥔 윤 대통령

11년 뒤 기업 밸류업 추진으로
‘이사 충실 의무’ 대상 놓고
우군인 재벌 기업과 충돌 양상

특유의 강골 기질로 돌파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한국사회 선진화도 가능할 것

2013년 한직인 여주지청장으로 물러나 있던 윤석열은 서울고검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특별수사팀에서 배제되는 등 외압이 심각하다고 폭로했다.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발 속에 같은 당 정갑윤 의원이 “사람(채동욱 검찰총장)에게 충성하는 것이냐”고 추궁하자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 답변은 그를 일약 스타 검사 반열에 올려 놓은 데이어 이후 대선 캐치 프레이즈로 작용하면서 대통령으로 신분을 바꿔놓았다. 국민들이 환호한 건 공직자의 섬김 대상이 윗사람이 아닌 국민이라는 상식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11년이 지난 지금 윤 대통령의 기업 밸류업 정책이 이 캐치 프레이즈를 재소환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이 정책이 우리 사회의 각종 병폐까지 해소할지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꺼내든 상법 제382조의 3항 개정 방침 때문인데, 이사의 충실 의무에 ‘주주’를 명시해 주인-대리인 관계, 즉 기업 지배구조를 선진화하자는 것이다. ‘회사=오너’라는 등식을 당연시해 온 가부장적 기업 풍토에선 쿠데타와도 같은 발상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일반 주주들은 내가 맡긴 자본이 제대로 쓰여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권리가 있고 이사에 충성을 요구하는 건 글로벌 스탠더드다. 유상증자 등 회사가 돈이 아쉬울 땐 주주에 손을 벌리면서 주요 경영 사안에 대해 배척하는 건 놀부 심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주인-대리인 문제 이론의 원형으로 통하는 2000년 전 예수의 달란트 비유는 청지기, 즉 대리인의 본분을 가혹하리 만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주인은 1달란트를 하찮게 여겨 땅에 묻었던 종에게 은행가에라도 투자해 이자조차 불리지 않았음을 꾸짖고는 성 밖으로 내쫓는다. 경제학계에선 이처럼 가치 창출에 역행하는 걸 가치의 파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가치 파괴 행위가 누적돼 결국 곪아 터진 게 1998년 외환위기다. 고작 3~4% 지분으로 이사진을 수족 부리듯 하는 재벌 오너의 황제 경영 폐해가 낱낱이 드러났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권고로 사외이사 도입을 의무화해 경영 감시에 나서도록 했지만, 이사회를 장악한 오너들은 이들마저 거수기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오너에 충성을 강요하는 후진적 지배구조는 어쩌면 우리 사회 전반에 ‘주인과 대리인’ 시스템 오작동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연·지연·혈연 등에 얽혀 자리를 나눠 먹는 패거리 문화나 회전문 인사, 낙하산 인사를 일삼는 ‘참호 구축’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사람에 대한 충성이 실력으로 둔갑한 조직에서 혁신의 싹이 틀 리 없다.

반도체 최강자였던 삼성전자가 고대역폭 메모리(HBM)에서 SK하이닉스에 밀리는 등 위기에 봉착한 건 오너의 지배구도 구축에 역량을 허비한 데 따른 결과라는 지적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윤 대통령과 이 원장의 상법 개정 추진이 공교롭게도 2018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 수사를 맡은 인연과 오버랩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당시 윤석열 수사팀은 ‘이사의 충실의무 위반’ 혐의로 이재용 회장과 삼성물산 전·현직 임원들을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삼성이 후계구도를 진행하면서 주주 이익 보호를 위해 합병의 사업적 타당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게 검찰 주장이었다. 이복현 원장이 상법 개정에 총대를 메고 나선 건 이 재판엔 졌지만, 법에 미비한 이사 충실의무를 보완하기 위함이다. 대기업의 총수 중심 지배구조를 뜯어고쳐야 기업 밸류업 성공을 보장할 수 있음을 통감한 것일 테다.

역시 재계는 이를 쿠데타로 간주하는 듯 반대가 거세다. 지난달 24일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의 등 8개 경제단체가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공동건의서를 정부와 국회에 제출했다. 전가의 보도인 ‘소송 남발로 투자 위축’ 주장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들이댄다. 경영판단 원칙을 준수하면 배임죄를 면해주겠다는데도 극구 반대하는 걸 보면 마치 이재명 전 대표의 방탄에 물불 안 가리는 더불어민주당을 보는 듯하다. 윤 대통령으로선 우군인 재계가 반발하니 보통 난관이 아니다. 그러나 선진 사회로 향하는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말 수는 없다. 대통령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무장한 특유의 강골 기질로 돌파한다면 재계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