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배신자 프레임’은 공멸의 길이다

[여의춘추] ‘배신자 프레임’은 공멸의 길이다

남혁상 편집국 부국장

입력 2024-07-09 00:32

노무현·고건, 박근혜·유승민 갈등으로 선거 패배 빌미 제공
총선 참패 3개월 만에 불거진 국민의힘 ‘읽씹’ 논란 한심해
성찰·혁신 없는 진실공방 두고두고 쓰린 상처로 남을 뿐

“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기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결과가 됐다. 저하고 저희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였다.”

2006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차기 대권주자 중 한 명이던 고건 전 총리를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과 정권 2인자인 총리가 여야 관계 정립, 인사 문제 등을 두고 갈등을 빚었던 사실을 거론한 것이었다. 현직 대통령이 과거 자신이 임명했던 2인자를 공개적으로 공격한 민주평통 발언은 반박→사과 요구→재반박으로 이어지는 등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다 고 전 총리는 얼마 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물론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참여정부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2015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야당과 협상 끝에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 통제권을 보장하는 데 합의하자 국무회의장에서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 달라”고 공개 발언을 했다. 대통령이 여당 원내사령탑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 역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 원내대표는 다음 달 사퇴했지만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이른바 ‘진박 감별사’ ‘옥새 파동’ 등 당정 갈등이 불거졌고, 총선은 여당의 패배로 귀결됐다. 이 과정에서 당정 갈등 회복과 정상화를 위한 노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박근혜정부의 운명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사태와 묶여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으로 마무리됐다. 국정 운영과 민생 해결은 뒤로하고 배신자 심판에만 몰두했던 정권의 역사는 이렇게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이후 배신의 정치는 보수 진영에 깊고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다.

석 달 전 집권여당의 총선 참패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2024년 7월 ‘배신의 정치’ 프레임이 보수 진영에서 망령처럼 다시 떠올랐다. 국민의힘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둔 상황에서 한동훈 후보의 채상병특검법 중재안을 두고 배신의 정치가 재소환된 것이다. 다른 후보들은 한 후보를 겨냥해 더불어민주당의 특검 낚시질에 낚여 탄핵에 말려들 수 있다며 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배신이며, 절윤(絶尹)의 배신 정치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와중에 김건희 여사 문자가 여권 내 배신의 정치 프레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김 여사가 지난 1월 비대위원장이던 한 후보에게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으나 어떠한 답신도 받지 못했다는 이른바 ‘읽씹’ 논란이다. 민감한 시점에 현직 대통령 부인의 문자가 공개되고, 그게 유력한 당대표 후보에 대한 전방위 공격 도구로 쓰이는 현재 상황은 정상적인 정치의 범주를 까마득히 넘었다. 현직 대통령 부인이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든 기이한 선례를 남겼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한 후보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키워준 윤 대통령을 배신했다는 프레임이 만들어진 이상 한 후보와 윤 대통령 부부 간 감정의 골은 메울 수 있는 단계를 지났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총선 참패가 불과 석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여권의 대표주자들이 문자를 둘러싼 진실 공방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의도 대통령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라는 비유에서 보듯 거대 야당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상황에서 이전투구를 방불케 하는 당내 권력 다툼을 용납하는 국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국정 운영과 당의 쇄신 방향을 토론하고 비전 경쟁에 진력을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지금의 볼썽사나운 모습은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집권여당에서 배신자를 솎아내고 낙인찍어 유배를 보내는 게 과연 국민이 원하는 집권여당의 모습인가.

대통령과 2인자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이를 조율하고 관리하는 것은 그들만의 책임이자 역할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지금 이런 모습이라면 보름 뒤 누가 여당 대표가 돼도 남은 건 상처밖에 없을 것이다. 성찰과 혁신 없이 ‘배신의 정치’ 논쟁에만 골몰한 대가는 두고두고 쓰릴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배신의 정치 굴레는 끊어야 한다. 배신의 정치는 정부, 여당 모두에 공멸의 길이 될 뿐이다.

남혁상 편집국 부국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