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脫러시아 느는데… 韓수출기업들 ‘진퇴양난’ 속앓이 [스토리텔링경제]

입력 2022-07-04 04:06

러시아로 상품을 수출하는 한국 기업들의 ‘눈치 보기’ 작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들은 ‘탈(脫)러시아’ 행보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한국 기업들은 대놓고 말을 못 꺼내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에 현물을 지원하거나 기부금을 보내는 등 지지를 표하면서도 러시아 시장 철수에는 보수적인 분위기다. 그나마 가장 전향적인 조치가 ‘러시아에 대한 선적을 중단한다’ 정도다.

사실 상당수 한국 기업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에도 러시아 수출을 지속하고 있다. 다만 이를 언급하는 일은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다. 러시아 수출 기업에 수출보험을 제공하고 있는 한국무역보험공사 역시 이를 부담스러워한다. 자칫 정부가 러시아 수출 기업을 옹호하거나 러시아를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의 대(對)러시아 수출액은 전쟁 발발 이후 감소세다. 3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4월 러시아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1.2%나 급감했다. 지난 3월 감소율이 9.7%였던 것을 고려하면 한 달 새 수출이 확 줄어들었다. 이는 미국의 대러 제재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컴퓨터, 정보통신, 센서 및 레이저, 항법 및 항공전자, 해양, 항공우주 등 7개 분야의 57개 기술이 적용된 제품의 러시아 수출을 제한했다.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아니더라도 이 제재를 피할 수 없다.

수출액이 크게 줄었지만 수출 자체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가 무역보험공사(무보)에서 제공하는 무역보험이다. 무역보험은 기업 수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단기 수출보험의 경우 중소기업은 100%, 중견기업은 97.5%, 대기업은 95%까지 돌려받지 못한 대금을 무역보험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러시아에 수출하지 않으면 이런 수단은 더 이상 필요 없지만 관련 기업들의 무역보험 가입 건수는 감소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은 전쟁 이전과 유사한 수준의 수출 보험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나면 과거와 같이 활발한 무역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계약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인 무역보험을 쉽게 포기할 기업은 없다”고 말했다.

무보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대러시아·우크라이나 수출보험을 이전처럼 유지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러시아 수출을 정부(공공기관)가 지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수출 관련 사고가 계속 발생하면서 보험 지급액이 늘어나는 점도 머리를 싸매게 만든다. 올 1~6월 러시아 수출과 관련해 발생한 사고는 지난달 22일 기준 19건이다. 지난해 사고 건수(11건)를 이미 넘어섰다. 발생한 손실액도 510만 달러(약 66억원)에 달한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사고는 계속 발생할 수 있다.

무보는 지난 3월부터 러시아에 수출하는 기업의 수출보험 심사를 계약 건별로 승인하도록 지침을 바꿨다. 이전에는 보상·보증 한도를 정하고 같은 수출업자와 한도 내 거래를 한 경우 별도 승낙이 필요 없었다. 보상비율도 대기업의 경우 70% 수준까지 낮췄다.

다만 한국 기업이 단기간에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는 일은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를 명분 삼아 러시아에서 발을 빼는 글로벌 기업들과 우리 기업들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러시아 시장 철수를 시작한 글로벌 기업들은 대러 제재를 공언한 미국과 유럽연합(EU)에 기반을 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자국 정부가 러시아 경제 제재를 발표하는 등 명확한 노선을 취하자 그에 맞춘 시장 전략을 내놓은 것이다.

스타벅스는 지난 5월, 러시아 내 130개 매장의 영업을 영구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글도 러시아 자회사를 파산 신청하는 등 2005년 진출한 이후 17년 만에 탈러시아 행보를 시작했다. 애플도 지난 3월 아이폰 등 제품 판매를 중단하고 애플페이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 외 테슬라, 엑손모빌 등도 탈러시아를 공언했다. 도이체방크, 지멘스 등 유럽 기업들 역시 러시아 사업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 기업은 정부의 외교적 판단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가 어렵다. 선적은 중단하되 최소한의 영업을 이어가는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미국은 정부 기조가 명확해 기업의 철수 결정이 쉽다. 하지만 한국은 제3자 입장이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 모두를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제적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2007년부터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해 왔다. 점유율 30.0%로 2위인 애플(15.0%)의 2배 수준이다. LG전자도 삼성전자와 러시아 가전 시장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다. 일부 기업은 러시아 직접 수출 대신 카자흐스탄 등 제3국을 통한 수출로 활로를 찾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지난 4월 카자흐스탄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6% 급등했다. 무보 관계자는 “한국 기업은 적극적으로 수출에 나서기보다 기존 판매량을 유지하는 수준의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